인터넷 표현물 규제의 원칙

1. 인터넷 공간과 스피치의 영향력

인터넷을 매개로 한 소통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인터넷 소통과 상호작용이 현실의 소통과 상호작용을 기능적으로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것보다 더 강력하고 광범위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믿기 어렵기도 하지만, 설령 믿고 싶어도 왜 그런지 알 수 없다고 본다. 즉 ‘현실보다 더한 인터넷’이란 생각 자체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인터넷이 현실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소통은 현실의 소통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하며, 따라서 인터넷 소통을 현실의 소통과 다른 어떤 단일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현실의 소통을 그렇게 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어 보인다.

인터넷 소통을 더 강력한 소통으로 보는 데는 까닭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그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의미화하기 때문이다. 본디 ‘인간의 행위’란 시공간에 점유한 인간의 신체적 움직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제도, 즉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의미화를 가능하게 하는 규칙이나 의례의 틀’을 거쳐야 행위가 된다. 그 제도란 새롭게 언어를 배우면서 문법이란 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 학생이 인식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결국 제도가 의미를 준다. 물리적 자원에 더해진 규칙, 규범, 의례 등을 적용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제도화가 이루어져야 운동이 행위가 된다.

인터넷 소통 행위는 특별한 방식으로 의미화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발견 가능한 정보는 쉽게 ‘표현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 웹을 통해 접근 가능한 모든 정보는 어떤 표현적 의도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면서 인터넷 정보를 표현물로 인식하고 접근하는 이용자의 의도는 쉽게 무시한다. 또한 인터넷 표현물은 쉽게 ‘공적 스피치’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정보를 어떤 행위자의 명시적 주장을 담은 발언으로 간주한다. 생각해 보면, 이는 놀라운 일이다. 현실은 물론 어디에서도 모든 정보의 배열이 저절로 ‘표현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1 모든 ‘표현물’이 ‘공적 스피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정보는 쉽게 표현물로 간주되고, 표현물은 쉽게 ‘언론’의 기능을 갖는 스피치로 인정된다.

우리는 그러나 거리에서 스치는 모든 얼굴을 ‘의미 있는 얼굴’로 간주하지 않는다. 가끔 주목해서 누구를 닮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메시지가 담긴 표현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부호와 신호를 ‘스피치’로 간주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그것들을 대체로 무시하도록 훈련받았고 또한 효과적으로 그렇게 무시하기에 성공적인 일상을 영유한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우리는 책에 담긴 모든 정보가 원리적으로 접근가능한 정보라고 할지라도 (즉 찾아서 읽어 볼 수 있다고 해도) 그 책을 ‘공적 스피치’로 간주하지 않는다. 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책의 효용이 높아진다. 즉 의견이 아닌 사실 명제가 있다는 생각, 사실 명제와 무관한 정보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책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소통의 가치가 높아지기도 한다.

그런데 왜 그럴까? 인터넷 정보를 표현물로 보거나 스피치로 보는 이들이 많은 까닭은 무엇인가? 인터넷을 ‘공간’에 비유하는 경향이 한 몫 하는 것 같다. 소통과 관련해서 인터넷 공간은 특히 구획되고 보호된 차별적 공간들의 집합이 아니라 단일하면서도 열려있는 단일한 공간처럼 취급된다. 이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소통’ 그리고 ‘상호가시적(co-visible) 소통’이 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인터넷 정보는 다른 매체를 통해 유통되는 정보와 다르다고 간주되는 것 같다.

망과 서버, 그리고 단말기를 자원으로 삼는 전자통신 프로토콜과 부호화된 자료의 집합인 인터넷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되기도 한다. 인터넷은 물이나 대기의 흐름, 숲과 같은 생태계, 건물이 들어선 지형 등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런데 ‘인터넷 소통’을 이해하고 개념화할 때에 ‘공간’이 되는 경우가 현저하다. 반면, ‘인터넷 비즈니스’를 논의할 때는 공간이 아니라 생태계나 정글과 같은 비유가 일반적이다. 인터넷 안보, 인터넷 상거래, 인터넷 교제, 인터넷 조직, 인터넷 교육 등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인터넷을 공간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생각해 보자.

한 번 확립된 비유는 유관된 생각들을 연결시켜서 다른 방식으로는 이해하거나 정당화하기 어려운 의미의 연관성을 만들어 낸다. 인터넷을 공간으로 간주하는 순간, 인터넷 행위는 공간을 점유한 어떤 행위가 되고, 그 행위의 주인인 행위자가 있어야 하며, 행위로 인해서 발생한 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터넷 소통이 현실의 소통과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과정이 대체로 이러하다. 그러나 꼭 이렇게 봐야 할 이유가 없다.

비교하건대, 20세기 초 방송 매체가 일반화 되면서 방송은 집 밖에서 안으로 어떤 관(channel)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물로 간주됐다. 혹은 개인에게 주사나 알약으로 주입되는 약품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런 방송의 효과가 지대하다고 간주됐던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관 또는 채널, 주사, 흐름, 용기, 내용물 등을 오래된 방송 관련 비유들이라고, 그것도 때로 적절할 뿐 대체로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비유들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제는 누구도 이런 비유들이 방송의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한 타당한 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점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인터넷 소통을 보는 시각이 이러하므로 그것의 영향력에 대해 별도의 검토나 논의 없이 쉽게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인터넷을 공간으로 보면서 인터넷 소통의 영향력의 특징을 규정하는 데 그것은 누구나 확인 가능한 의도가 있으며, 울림이 있으며, 접근 가능한 영향력이라는 식으로 규정된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지만, 이렇게 볼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더라도 그 비유 또는 시각의 제한성을 먼저 검토하는 것이 순서겠다.

2. 자율성과 위해의 원칙

영향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뿐만 아니라 영향 받는 수용자의 관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정보가 영향력이 되려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결국 정보는 수용자의 주목과 이해, 수용과 기억을 경유해야만 영향력이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정보의 영향력을 인터넷 공간에서 유통되는 정보의 내용과 양으로 추론하는 것은 언제나 피상적이다. 그것은 수령되지 않은 편지를 꺼내서 그 효과를 분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현실의 메시지 수신은 ‘수령된 편지’와 달리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최소한 주목과 이해, 받아들임(acceptance)과 기억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온전히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율성이란 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

주목이란 개념만 보아도 그렇다. 선택 가능한 주목의 대안이 없다면 주목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대상 가운데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주목이다. 이해도 마찬가지다. 특정 방향으로 이해를 유도하는 것이 필연적인 메시지가 전달된다면 그건 이미 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삽입이거나 주입이다. 받아들임도 마찬가지다. 자율적 판단 주체가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 선택이 현실적인 조건에서 결국 스스로 결정해서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해야 ‘진정 받아들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의 계시가 필연적인지 아니면 조건적인지 생각해 보자. 만약 필연적이라면 인간은 거의 하는 일이 없는 셈이다. 이런 인식에 수용자 자율성이란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

근대적 인간의 능력을 구성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다. 다만 누구도 그 능력의 배후에 자율성이란 개념이 있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칸트와 같이 자율성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든지, 다른 어떤 자연주의적 방법을 생각해서 자율성을 아예 없애 버리든지, 아니면 어떤 혼란스런 형이상학을 끌어들이든지 학자마다 자율성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 결과 인간의 자유가 실재하는지, 심지어 가능하기는 한지, 아니면 그저 우리가 지어낸 것인지 논의도 분분하다. 그러나 자율성이란 개념을 논의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행위가 왜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자율성 개념이 없이 인간의 행위가 기계의 작동이나 짐승과 신의 행위와 어떻게 다른지 논의하기 어렵다.

문제는 근대 이후 인간의 자율성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어떤 도덕적이며 법적인 판단도 어렵게 되었다는 데 있다. 자율적 개인의 의지에 따른 행위가 그의 책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자율성의 행사를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자율적 행위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경험적 원인이 아니라 예지적인 원인이다. 즉 현상적 원인이 어떻게 가능한지 따져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제된다. 그것은 자연적 세계 내에서 지성과 이성을 이용해 세계를 파악하는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원인성이다. 우리가 칸트의 생각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율성 개념의 실재성과 타당성과 별개로 자율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근대적 인간에 대한 이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정보의 영향력을 어떻게 규정할지 생각해 보자. 어떤 정보이든, 즉 그것이 거대 프로파간다 머신의 캠페인 메시지이든 아니면 친구의 속삭임이든 개인이 수용하지 않으면 영향력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수용이 ‘선택 가능한 행동의 대안’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즉 자율적 행위 주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주목하고,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할 수 있는데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며,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는데 받아들인 정보가 영향력이 된다.

극장에서 누군가 ‘불이야!’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자율적으로 선택 가능한 행동의 대안을 사실상 제한한다. 어두운 곳에서 불났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면, 무시할 도리가 없고, 불이 났다고 이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며, 결국 그에 따라 급격하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자율적 행위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주목, 다른 이해, 다른 신념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제한된, 그래서 다른 행위의 대안을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다. 요컨대 극장에서 ‘불이야!’ 외치는 소리는 선택적으로 수용 가능한 정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외진 마을의 모든 초등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자해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 마을 학생들의 자율적 판단은 이미 심각하게 제한된 것이다. 구원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삶을 기획할 것을 생각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요컨대 정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여부, 즉 수용된 정보가 행위의 원인이 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의 발휘로 인한 그의 행위적 선택 가능성에 현실적 제한이 있느냐 마느냐이다. 그 정보의 내용적 특성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선택해서 주목할 수 있으며, 선택한 내용을 이해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으며, 이해한 내용을 받아들여 내 생각으로 만들어 그에 따라 행동하거나 아니면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런 영향력의 행사에 대해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고 문제 삼을 수 없다. 이것이 자율성에 근거해서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표준 설명 모형이다.

나는 인터넷 표현물의 유통과 효과 그리고 그에 대한 규제 가능성을 논의할 때, 이 자율성에 기초해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표준 모형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규제 당국이 국가라면 더욱 이 모형에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능에 비해 개인의 선택은 항상 왜소해 보이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한 개인의 행위가 다른 개인에 위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건에서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원리적으로 채택하는 견해이기도 하다. 이른바 ‘위해의 원칙(the harm principle)’으로 알려진 이 주장의 난점은 ‘위해’를 좁게 규정하면 사실 상 규제 대상이 되는 스피치가 거의 없게 되고, 반대로 넓게 규정하면 거의 모든 스피치가 규제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육체적 상해를 초래하는 표현물은 규제 대상이라고 쉽게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개인의 정신적 고통’, ‘집단 정체성에 대한 침해(offense)’, ‘사회적 모멸감’ 등과 같은 범주를 도입하면 사정이 복잡해진다. 따라서 일부 논자들은 위해를 유발하는 스피치가 아니면 규제할 수 없다는 위해의 원칙은 너무 적게 규제범위를 설정한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그 대신 ‘침해적 스피치면 규제할 수 있다’는 침해의 원칙(the offense principle)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해의 원칙이든 침해의 원칙이든 그 표현물의 내용에 따라 규제를 정하려는 의도는 현실적으로 더 많은 논란을 만들어 낼 뿐이다. 일단 어떤 위해이고 얼마나 침해적인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또한 이런 논란이 정치적 논쟁으로 전화해서 결국 맥락에 따라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문제다. 나는 현실적인 위험을 유발하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과 더불어 정보 수용자의 자율적 선택의 여지가 규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인터넷 정보의 수용과정에서 위해나 침해를 회피할 수 있는 충분한 선택이 보장되는 한, 그 위해나 침해의 내용이 무엇이든 정보의 수용자가 선택해서 주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인 바이므로 제3자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정 인터넷 표현물이 회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범람하고,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오해의 여지없이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그로 인해서 다른 대안적 인식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면, 이런 인식이 초래하는 위해 및 침해의 내용을 따져서 해당 표현물을 규제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인터넷 표현물을 충분히 피할 수 있으며, 찾더라도 주목하지 않을 선택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이해가 경합하는 맥락에서 제시된다면 해당 표현물이 초래하는 위해 및 침해의 내용과 무관하게 직접적 규제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정보 수용자가 스스로 결정해서 접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자체가 개인의 정보 수용의 선택을 강화하는 기술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 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정보제공을 가능하게 하고, 새로운 인터페이스로 주목을 조절할 수 있는 재량을 주며, 맥락적 정보와 관련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이해와 해석을 도울 수 있다. 인터넷 환경은 수용자가 어떤 정보를 받아들여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기능을 강화하는 정책은 더 많은 노출과 주목, 더 다양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다층적인 수용을 낳을 것이며, 결국 인터넷 정보가 유발하는 위해와 침해의 가능성도 줄어 들 것이다. 요컨대 위험 여부에 주목하는 것보다 자율적 선택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1. 인터넷이 아니라 어디에서라도 인간은 ‘표현물’과 ‘말씀’을 알아보기 쉬운 쪽으로 진화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즉 구름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거북이 배딱지에서 신호를 알아보는 경향(pareidolia)이 강한 자들이 문명을 만들어 냈을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저자 : 이준웅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