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털기로 본 한국의 인터넷 문화
지난 4월 해외출장을 가던 한 대기업의 임원이 항공기 승무원에게 라면 맛을 트집 잡으면서 폭력을 가한 사실이 밝혀졌다. 필자는 사건이 일어난 사실을 인터넷의 가십란에서 접하였다. 본능적으로 일이 커질 것을 예감하였다. ‘곧 인터넷에서 난리가 나겠구나’, ‘그 임원이 누구인지가 밝혀지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한 인터넷신문에서 보도한 이 사건은 곧 네이버 등의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1위를 차지하였고, 인터넷을 넘어 대형언론사와 방송국의 취재가 이어졌다. 그리고 사건발생한 지 2-3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임원이 도대체 누구냐라는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진과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누군가에 의해’ 제공되고, ‘누군가에 의해’ 셀 수 없는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었다. 클릭 한 번으로 그 임원이 어떤 회사에 어떤 직책을 맡고 있으며, 얼굴은 어떠한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임원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사건이 중대한 국면으로 치닫게 되면서 그 대기업의 임원은 해고가 되었고 사건은 일단락 지어졌다. 권력을 가진 이가 그렇지 못한 이에게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행위에 대해 분노한 수많은 이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그 분노를 결집시켰고, 그 분노의 표출에 있어서 신상털기가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대상이 명확하게 있어야 분노의 결집과 표출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 정부의 대변인이 대통령의 미국순방 과정에서 인턴을 하던 여성에 대해 성추행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국민들은 또 한 번 권력을 가진 자들의 권력남용과 부도덕함에 분노했다. 특히 그 대변인이 스스로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가이드’ 등의 단어를 써가면서 약자들에 대한 우월적 의식을 보이는 행위가 나타나 국민들의 분노가 증폭되었다. 인터넷은 또 한 번 뜨겁게 달구어졌다. 언론들 역시 맹비난에 나섰고 결국 이 대변인은 한국사회에서 ‘퇴출’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그 대변인에 의해 성추행 당했던 인턴여성이 누구인지를 사진과 정보까지 적어서 인터넷 상에 올린 것이다. 특히 미모의 사진에 대해 많은 댓글들이 ‘연예인급 미모이기 때문에 대변인에게 원인을 제공한 듯’, ‘오히려 이 여성이 대변인을 유혹했을 수도 있다’라는 내용을 담기 시작했다. 약자를 보호해오던 모습들은 사라지고 약자에게 오히려 폭력적인 행위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진과 정보는 거짓인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피해여성에게는 자신에 대한 신상털기가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인터넷은 정보와 소통의 공간이다. 현대사회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보다 효율적으로 얻기 위해서, 정보들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인터넷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충분히 이루면서 이제 인터넷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어졌고, 상상하기도 싫어졌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해 ‘감시하는 눈’들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감시와 통제는 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쾌락을, 이를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철저한 권력의 비대칭의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그 사람은 나를 볼 수 있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은 나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한다. 문제의 발생은 도대체 무엇으로 시작된 것일까?
현대사회의 위험(risk)의 많은 부분은 ‘정상적인 과정’에서 발생한다. 정보를 공유하고 효율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인터넷을 만들었고, 인터넷은 근본적으로 정보의 축적과 제공을 중심으로 한다. 즉 인터넷의 존재이유와 가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보들이 축적되고 제공되기 때문에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모두 자신의 정보들이 인터넷 공간에 제공되어 있다. 먼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제공된다. 조직의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그 조직 구성원들이 누구인지를 공개해야 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합의되고 있다. 구성원의 사진은 물론이고, 이메일까지도 공개된다. 조직에 따라 상세한 약력까지도 공개되는 경우도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엄청난 양의 개인신상정보들이 제공되며, 폭력적 행위에 노출되어 있다.
또 하나의 양상은 개인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신상을 노출하는 행위이다. 블로그, 싸이월드에서 이미 이러한 행위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누구와 친한지, 어디에 갔다 왔는지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한다. 자신의 얼굴, 친구들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된 수많은 사진들이 다른 이들에게 제공되고, 자신의 세계관, 정치적 견해, 문화적 취향이 모두 제공된다. 특이한 것은 무차별적으로 노출될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신상을 노출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과 같은 SNS의 등장으로 더욱 뚜렷한 증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소위 빅데이터의 핵심은 개인신상정보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신상털기가 폭력적이라면 신상을 털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문제인 정보제공을 중단해야 하는데, 이는 인터넷의 퇴출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게 때문이다. 즉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를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인터넷을 버릴 수 없다면, 인터넷이 없는 시절도 돌아가기 싫다면, 인터넷상에 제공되는 정보들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을 필연적으로 안고가야 하는 위험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질문을 던져보자. 신상정보들이 제공되더라도 그것을 털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도대체 다른 사람의 신상을 왜 터는 것인가? 왜 궁금해 하는 것인가? 이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통합적 관점에서 이러한 행위를 이해할 수도 있으며, 반대되는 관점에서 군중론적 관점에서도 설명을 시도할 수 있다. 사회통합적 관점에서 보면 누군가가 전체 사회성원들의 공익에 해가 되는 행동을 했을 때, 그리고 그 누군가를 반드시 알아야 처벌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사회성원들의 통합이 이루어진다고 판단될 때 신상털기가 이루어진다. 특히 검찰, 경찰 등에서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때, 이 과정에서 무언가 음모가 있다고 판단되고 권력의 비호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이 될 때, 오히려 공권력을 믿기 보다는 일반 시민들이 인터넷상에서 서로 협력하여 그 누군가에 대한 신상정보를 파헤치는 것이다. 특히 그 누군가가 연예인 등 사회적 지지를 많이 확보하고 있는 인물일 경우에는 이러한 신상정보 털기가 더욱 강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법적으로는 문제가 될 지라도 국민들의 분노를 덜어주는, 소위 ‘국민정서법’에는 합당하는 옳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결국 제도권을 믿고 맡겼다간 강자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해결 났을 것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였기에 이는 사회적 공익에 크게 기여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한편, 전 정부대변인의 성추행 피해자인 인턴여성의 신상털기를 시도하고, 그 여성의 사진과 정보가 잘못된 것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다른 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살포한 행위는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이는 위의 사례처럼 ‘사회적 정의 실현을 위해 신상털기’를 했다고 믿는 사람과 다른 사람일까? 성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할 때 피해자들은 주로 여성들인데, 이 여성들에 대한 신상털기의 주체는 대부분 남성이다. 그 여성이 피해자인지 아닌 지가 중요하지 않다. 성과 관련된 문제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여성이기에 이러한 문제에 연루되었을까? 어떤 외모를 하고 있을까?’라는 왜곡된 호기심이 작동한다. 이는 그 여성을 몰래 엿보고 싶은 일종의 관음증에 기초한다. 그리고 신상을 털게 되었을 때 이 신상정보를 혼자만 알고 있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죄의식이 커진다. 이때 이 신상정보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공유하게 한다. 다른 이들 역시 호기심으로 ‘그녀가 누구인가’를 엿보기 위해서 그 신상정보를 클릭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한다. 집단적 관음증이 작동하는 것이다. 집단적 관음증은 ‘마녀사냥’으로 연결된다. 사회가 불안할 때 그 사회의 불안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 여성을 찾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 여성에 대한 집단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개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공동체 결속을 도모하는 것이 마녀사냥이다. 인턴여성과 관련해서도 그녀의 피해사실을 오히려 부정하면서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댓글들에서 이러한 마녀사냥 행위가 나타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광기 행위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이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학자 르봉은 ‘군중론’을 통해서 집단적 광기에 있어서 계층적 지위, 경제적 지위는 모두 사라지며, 군중 속에 들어가면 개인은 지극히 ‘정의로워지거나’, 지극히 ‘사악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앞으로 인터넷에서의 신상털기의 양상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가장 큰 이유는 페이스북 등 SNS 공간에서 개인들의 자발적인 사생활 노출이 계속해서 축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보는 구글 검색만 하면 너무나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특정한 해킹능력을 지닌 이들에 의한 신상털기가 문제였다면, 앞으로는 너무나 평범한 이들에 의한 평범하지 않은 광기어린 행동들이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고독하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무대의 전면에 서고 싶은데, 현실에서 자신은 항상 조연에 불과하다. 이때 무대의 전면에 서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SNS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자신을 주인공의 모습으로 연출하는데, 이 연출의 요소 중 핵심적인 것이 사생활 정보이다. 그리고 이 정보들은 폐쇄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제공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향후 신상털기가 더욱 확산될 위험성이 높은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해결방안은 ‘광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성숙도에 달려있다. 자신이 행한 클릭 한번, 공유 버튼 누르기 행위 한번이 신상을 털린 개인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되는 지를 이해하고 스스로를 제어하는 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물론 이는 인터넷 이용자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클릭하는 행위 자체가 정보검색이며 공유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통제하라는 것 자체가 한편의 시각에서 보면 정보의 차단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보의 공유, 정보의 검색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바로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리고 지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서 자신의 삶이 파헤쳐진다는 것은 이러한 권리가 크게 손상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상털기의 유혹을 극복하는 데 있어 인권을 더욱 먼저 생각해야할 때이다.
<참고문헌>
Le Bon, Gustave(1974). psychologie des foules. PUF: Paris.
GOFFMAN E.(1973). La mise en scène de la vie quotidienne, Paris, Editions de Minuit.
최항섭(2008). 정보사회에서의 지식 가치의 변화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사이버커뮤니케이션학보』. 25권 4호, 223-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