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평] 창조력 코드

수학자와 법률가

『창조력 코드(2019)』(The Creativity Code: How AI is Learning to Write, Paint and Think)는 수학자가 인공지능(알고리듬)에 대하여 쓴 책이다. 부제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인공지능이 어떻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판단을 하는지를 적고 있다. 군(群) 이론의 수학자인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Marcus du Satoy)는 알파고(AlphaGo)가 바둑 인간 고수를 이긴 충격적 사건을 시작으로, 바둑, 미술, 음악(작곡), 스토리텔링(작문) 등 각 창조력을 요하는 예술 분야에서의 인공지능의 활약을 수학자의 관점에서 적고 있다(그리고, 나는 수학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법률가의 시각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수학자의 언어와 일반인의 언어는 다르다. 수학자는 증명(證明)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국경과 언어에 관계없이 전 세계의 수학자들이 모여 공통의 주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소통할 수 있다. 법률가의 언어와 일반인의 언어는 다르다. 하지만 나라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법도 다르다. 나는 법률이나 법리를 수학의 방식을 빌어 – 언어나 문화의 장벽을 벗어나 – 도형이나 수식으로 간명하게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때늦은 수학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수년 전 읽었던 책(『수학적 경험․ 상』. 필립 J 데이비스, 로이벤 허시 지음. 경문사 제195쪽)에서 흥미로운 표현을 발견했었다. 그 후로는 공부를 하면서 접하게 되는 수학의 여러 관점을 내가 종사하는 직역에도 대입하여 적용려고 시도해 보게 되었다. 옮기자면 이렇다.

회의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 순서 집합 <M, P, c, s, C1, C2, b, i1, i2, S, i3>이다.
유클리드 공간의 유계인 부분 M,
참석자의 집합인 유한 집합 P,
의장과 서기라 부르는 P의 두 원소 c와 s,
의자들이라 부르는 유한 집합 C1,
커피잔들이라 부르는 유한 집합 C2,
벨이라 부르는 원소 b,
P에서 C1으로의 단사함수 i1,
C2에서 P로의 사상 i2,
발언의 순서 집합 S,
c가 i3의 상에 속하는 성질을 가진 S에서 P로의 사상 i3.
만약 i3이 전사 함수이면, 통상 모든 사람들이 발언권을 가진다고 말한다.

입시 때문에 억지로 공부하던 학창 시절과는 다른 느낌으로 즐겁게 수학책을 읽었다. 완벽하게 이해되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고 도입하여 무언가를 증명해내려는 수학자들의 관점이 몹시 신기했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를 법학에 접목하여 볼 수는 없을까 싶었다. “리치 흐름(Ricci flow)이란 리치 곡률(Ricci curvature)이 음(陰)인 방향으로는 계량 g를 늘리고, 양(陽)인 방향으로는 줄이는 과정이라고 비형식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 I』 티모시 가워스(Timothy Gowers), 471쪽), “구면 라돈 변환(spherical Radon transform)의 역변환은 의료 영상기기의 출력으로부터 영상을 만드는 데 중요하다”(같은 책, 496쪽)를 읽고 이 내용을 법적 관점으로 되짚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리치 흐름이란 다양체의 구조를 단순화하는 것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는데, 헌법의 가치와 개별법률의 가치를 두고, 법률 내의 여러 요소들이 헌법의 가치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고 또 얼마나 가까운지 측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예컨대 이 법률의 평균 스칼라(scala)값은 ○○이다 라고 수식화해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인권 규범과 각국 법률 규정을 두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적법화 값의 순서를 살펴서 각 나라의 스칼라값을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예컨대 이 나라는 수치가 ○○이므로 근로조건 및 이에 관한 법률이 가장 잘 정비되어 있다라고 법적 진단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모델(model)을 만들어서 여러 관점에서 결합된 내용을 재해석하여 컴퓨터 단층촬영(CT, Computed Tomography)처럼 3차원의 상(像)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면, 법학/소송에서 실체를 사후에 재구성하는 일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러한 국가별 법적 거리(距離)를 리만 다양체(Riemannian manifold)에서 푸리에 변환(Fourier transform)을 하여 다시 라돈 변환을 한다면 그 모델을 유형화할 수 있지 않을까.

수학자는 기왕의 공리, 명제 등을 바탕으로 새로운 증명을 하는 사람이다. 의미 있는 새로운 증명을 이루어 내는 일이 수학자의 목표다. 즉, 영속적인 예술 작품을 남기겠다는 예술가의 열망과 수학자의 열망은 공통점이 있다(물론, 순수수학이냐 응용수학이냐에 따른 약간의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법률가는 인간을 위한 더 나은 법리와 선례를 구축하고픈 열망을 가지고 있다. 저자가 수학자라서 좋았다. 수학자라서 반가웠다. 다른 영역의 전문가가 이 인공지능의 발전 사태가 자신의 분야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궁금했다.

알파고와 오르가즘

이 책 『창조력 코드(2019)』에는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왔던 장면을 적고 있다. 체스 경기에서 인간 챔피언을 꺾은 딥블루(DeepBlue), 퀴즈 쇼 ‘제퍼디(Jeopardy!)에서 우승한 왓슨(Watson), 바둑에서의 알파고. 인공신경망을 통한 시각 이미지화 코드인 딥드림(DeepDream). 그리고 일반에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곡(作曲)에서의 각종 인공지능 알고리듬 활용 시도, 작문(作文)에서의 인공지능 사용 등이 챕터를 달리하여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과연 인공지능은 창조력(창의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인간이 가장 창의력을 발휘하는 예술 분야에서의 인공지능 연구의 발전 흐름을 적고 있다. 이 책의 번역판 카피 문구는 “인공지능은 왜 바흐의 음악을 듣는가”이다. 인공지능은 학습하여 인간처럼 창작할 수 있을 것인가.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사랑하고 섹스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질투하고 혐오를 할 수 있을 것인가.

2002년 한국에서 출간된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작품 ‘뇌’(腦. 원제 :최후 비밀, L’ultime Secret)에는, 다들 기억하다시피, 인간 체스챔피언이 인공지능 딥블루와 대결을 하여 패한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출간 당시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아직은 내게 생활용어가 아닌 학술용어인 성행위(sex)를 호르몬의 움직임 등 생리학적 관점에서 담백하게 표현한 작가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만큼이나 내게 충격적인, 이세돌이 알파고에 첫 대국에서 패배하던 그 날, 나는 이 작품의 한 대목이 떠올랐었다.

“(전략) ~ 그의 뇌 속에서, 극도로 흥분한 뇌하수체가 차고 넘칠 만큼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내보낸다. 이 호르몬의 자극을 받은 심장은 몸의 요소요소에 더 빠르게 피를 보낸다. 그녀의 뇌 속에서, 시상 하부가 차고 넘치도록 많은 황체 호르몬을 방출한다. 이 호르몬은 젖분비 호르몬의 분출을 유도하고, 이 젖분비 호르몬은 그녀의 배와 젖꼭지에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 (중략) ~ 룰리베린과 황체 호르몬과 테스토스테론이 혈관 속에 흘러들어 한데 뒤섞인다. 이 호르몬들은 연어가 힘차게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이, 동맥과 정맥과 소정맥을 거쳐 다시 심장으로 들어간다. ~ (중략) ~ 피부 밑의 근육들이 더 힘을 내기 위해 당분과 산소를 요구한다. 그들의 뇌 속에서는 시상이 세포들의 활동을 통괄하려고 애쓴다. 시상 하부가 이 모든 과정을 감독하고 있다. 마침내 그들의 대뇌 피질에 생각이 형성된다. ~ (중략) ~ 그러자 심장이 8헤르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뇌도 마침내 8헤르츠의 파동에 스스로를 맞춘다. 이로써 뇌와 심장과 성기가 하나로 연결된다. 그들의 송과체가 활기를 띠면서 앤도르핀과 코르티손과 멜라토닌을 방출하고, 이어서 천연의 디엠티를 내보낸다. ~ (후략)”

소설 속에서의 위 표현에서도 나타나듯, 성행위라는 것도 결국은 ‘호르몬’이라는 관점에서 분해 가능하다. 로봇도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인공지능의 설계자들은 질문자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위와 같이 그 주제에 접근할 것이다. 바둑은 경우의 수가 무한대에 가깝게 많아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종래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위와 같이 섹스와 오르가즘을 다른 관점으로 분해했듯, 딥마인드의 연구진은 바둑을 기존 사람들의 관점과는 다르게 접근하여 분해해버렸다.

바둑은 모양을 중시한다. 오청원 9단은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調和)라고 했다. 바둑은 형세가 집(家)이 되고 집이 많으면 이긴다. 이런 바둑이라는 게임을 단순히 초반 포석, 중반 전투, 마지막 끝내기 등의 의미로만 분해하는 것은 아주 어색하다. 그래서, 바둑 분야의 컴퓨터 대결은 모양(image) – 혹은 패턴(pattern) – 에 관한 형세 판단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지가 중요하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제1국을 보고, 알파고의 패턴 분석에 깜짝 놀랐다. 기계는 ‘두터움’을 모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양, 형세 등의 단어는 이해는 되지만 설명하기 쉽지 않은 단어다. 서양 사람에게 동양의 ‘기(氣)’라는 단어를 설명하려면 영화 스타워즈에서의 ‘포스’(force)라는 단어로 굳이 설명할 수는 있다. 바둑에서도 기세(氣勢)가 존재한다. 판 외에서의 상대 전적 때문에 대국 전부터 주눅들 수도 있다. 판 내에서도 팻감 부족으로 패 싸움에서 진 흥분은 실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게 바둑의 묘미다. “이 수(手)는 ‘맛’이 나쁜데요”라는 바둑 해설이 가능한 이유도 그래서다. 그 맥락에서 보자면, 호르몬으로 설명한 섹스는 가슴 콩닥거림이 없다. 섹스는 호르몬 분비 행위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컴퓨터가 두는 바둑은 덜 설렌다. 바둑은 패턴 분석 행위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이세돌 9단이 패배한 날 나는 슬펐다.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는 수학자는 패턴을 인식하여 거기서 법칙을 찾는 사람이라고 책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능력에 대해 놀라움과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수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저자는 컴퓨터 코드로 하는 수학증명이 무슨 수학증명이란 말인가 하고 강변하고 있지만, 전 세계의 몇몇 사람만이 관심을 가지는 수학증명과 그 증명에 대해 검증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인공지능에 자리를 할애해야 할 필요성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1998년 필즈상을 받은 수학자) 티모시 가워스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컴퓨터가 결국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게 되는 걸 근본적으로 막을 장벽은 없다고 봅니다. 이는 애석한 일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정말 흥미진진할 겁니다. 인간의 개입이 점점 줄어들고 증명에서 컴퓨터가 감당할 수 있는 ‘지루한’ 부분이 점차 개선되면 우리는 재미있는 부분에 대해 마음껏 생각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357쪽).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싶다. 그런데 그 재미있는 부분을 마음껏 생각하는 일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그때는 어쩔 텐가. 창조의 영역이란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수학자가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발견일지 발명일지 어느 쪽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법학의 영역에서 자연법(自然法)과 실정법(實定法)의 모호한 경계만큼이나 나는 선뜻 단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무지(無知)와 부지(不知)

가을에는 여러 수트 중에서도 버건디(burgundy) 빛 수트를 나는 좀 더 자주 입는다. 왠지 끌린다. 양광(陽光) 아래의 은은한 빛깔을 보며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 “양복색이 참 멋있네요”, “이걸 무슨 컬러(color)라도 부르나요? 와인 빛깔?” 와인 빛깔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레드와인, 화이트와인이 있으므로 와인 빛깔이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지칭하는 ‘버건디’라는 색이름을 알고 있으면 대화가 간명해진다. 따지고 보면, 앞서 이야기하였던 바둑이라는 게임에서 ‘뒷맛이 나쁘다’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알파고라면 정확히 그 수순이 향후 대국에 미칠 영향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터이니 뒷맛 운운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기계와 인간은 사용하는 언어가 점점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기계가 인간을 학습하기 시작하지만, 멀지 않아 기계가 왜 그런 판단 또는 결론을 내렸는지 인간은 궁금해하기 시작할 것이다(이른바 알고리듬 설명 책임). 그리고 그 상황이 익숙해지다 보면, 의문을 갖는 것조차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주객이 전도될 것이다.

“알고리듬은 우리 자신에 관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려줄 잠재력을 품고 있다. 어떻게 보면 딥러닝(deep learning) 알고리듬은 인간 코드에서 우리가 지금껏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특징들을 집어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마치 색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빨강과 파랑을 구별할 말조차 없었는데, 알고리듬이 우리의 호불호 표현에 근거해 여러 물체를 빨갛고 파란 두 종류로 떡하니 나눠 놓은 것과 같다. 우리가 특정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런 취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매개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취향과 관련된 인간 코드는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다. 하지만 컴퓨터 코드는 우리가 직감하기는 하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의 취향적 특징들을 식별해 냈다.”(137쪽)

인간의 언어는 어휘의 한계를 가진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유명한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표현할 적절한 말이나 단어를 모른다면,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왜곡 없이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 2차원의 납작한 개미가 3차원의 붉은 노을을 볼 때 드는 느낌은 어떨까 생각해 보자. 굳이 개미가 아니라도 좋다. 2차원 평면 공간에 존재하는 생물로서 전후좌우만 볼 수 있고 높이를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상태면 된다. 이 2차원의 납작한 개미 – 계속 개미라 부르자 – 에게 3차원의 붉은 노을을 설명하기는 무척 어렵다. 개미에게는 높낮이의 시야가 없으므로 지평선에 닿는 순간의 빨간 선(線)만 보일 뿐이다. 3차원의 우리가 보는 동그란 붉은 태양이 서서히 지평선으로 하강하는 장엄한 장면이 개미에게는 지평선에 보이는 빨간 선이 등장했다가 길어졌다가 다시 점점 짧아지는 것으로 표현될 뿐이다. 물론 수학을 잘 아는 개미라면, 빨간 선들을 적분하여 동그란 태양의 모양을 추측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학에 관심 있는 이 개미조차도 태양을 원(圓, circle)으로 인식할 뿐 구(球, sphere)로 인식하기 어렵다.

실은 우리도 이 개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블랙홀이라고 인식했던 것은 실은 관측장비의 부족으로 2차원으로 보고 판단하였기에 원이라 생각하여 홀(hole)이라 이름 붙였지만 실은 중력이 너무도 커서 빛조차도 탈출할 수 없는 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14)의 상세한 설명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이러한 내용도 조금은 알고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왜 인공지능이 그러한 판단을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 부지(不知)는 공포(恐怖)를 낳는다.

그간 인간의 바둑은 삼라만상과 희로애락을 가로세로 19줄의 공간에 담은 현기(玄機) 어린 경기였다. 알파고라는 종(種)의 바둑이 인간종의 바둑 속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두 신수(新手)에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결국 알파고의 승리 결과에 감염되었다. ‘인공지능의 도전’은 ‘인공지능에의 도전’으로 끝났다. 1주일 동안 많은 사람은 충격 속에서도 앞으로의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마음의 준비를 했고 한편으로 새로운 종(種)의 접근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꼈다. 실수와 실착의 기준은 시종(始終) 인간이었다. 실수(失手)로 여겼던 알파고의 한 수가 승리 이후에는 묘수(妙手)로 분석되듯 말이다. ‘지금 스스로 뒷맛을 없애는 수를 두고 있습니다’라는 해설자 말 속의 ‘맛’이라는 단어가 예전에는 바둑의 낭만으로 들렸는데, 지금은 알파고 만큼의 정확한 수읽기가 안 되기 때문에 판단이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려는 단어로 들린다. 알파고라는 종(種)의 바둑은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이제 ‘맛이 나쁘다, 좋다’는 표현은 사라질 것 같다. ‘있다, 없다’는 정확한 표현만 남는다. 바둑의 맛은 바뀌었다. 애매모호(曖昧模糊)함은 여지(餘地)가 아니라 무지(無知)가 되었다.

이종(異種)과의 동거(同居)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충격에 대하여, 누군가는 “알파고가 승리하더라도 이는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빨리 달리는 자전거나 자동차를 만든 것과 같을 뿐이다”라고 달래며 이야기한다. 글쎄다. 그런데 위로하는 그 말이 실은 더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다.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전거나 자동차를 만든 것” 때문에, 더 이상 사람들은 우사인 볼트처럼/만큼 빨리 달릴 필요를 못 느끼게 되었고 노력도 하지 않게 되었지 않은가. 또 누군가는 말한다. 인공지능이 아니라 ‘바둑’이라는 게임을 잘하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역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이 범용(汎用)이 될 수 있어서 더 무섭다. 알파고는 삼라만상을 담을 수 있는 바둑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 세상을 분석해낼 수 있겠다고 나는 느꼈다.

바둑용어는 신문 기사 등에서도 사건이나 상황을 상징하는 의미로 활용되고,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쓰인다. 바둑은 인생과 현실을 투영(透映)한다. 윤태호 작가의 인기 웹툰 미생(未生)은 제목도 바둑용어일 뿐 아니라 매회 차의 시작은 수순을 담은 기보(棋譜)로 시작되었다. 제1회 응창기배 조훈현 9단 대 섭위평 9단의 결승 제5국의 기보다. 우승 이후 한국 바둑은 일본과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이 되었다. 이 기보는 이러한 맥락을 담고 있다. 즉, 미생의 각 회차마다 수많은 사건과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역(逆)으로 그 내용을 총합하여 요약하면 결승 제5국의 기보가 상징하는 바와 같아지는 것이다. 미분(微分)의 역은 적분이고, 적분(積分)의 역은 미분이다.

미국의 인기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나 ‘웨스트 윙’의 스토리에 등장하는 갈등의 축과 주요 변수들을 바둑으로 치환(置換)하여 볼 수 있다. ‘법안 통과에 비토(veto)하지 않기’, ‘정적(政敵) 제거를 위해 세무조사하기’, ‘반대파 의원 불륜 스캔들 폭로하기’ 등의 현실 정치 세계의 이슈는 ‘바꿔치기’, ‘어깨 짚기’, ‘치중(置中)하기’, ‘역 끝내기’, ‘사석(捨石) 작전’ 등의 바둑판의 상황으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생각을 이어서, 정치를 바둑으로 시뮬레이션해서 이를 현실정치에 응용할 수 있다. 이러한 데이터는 굳이 드라마가 아니라도 현실 세계의 옛 정치면 기사들을 모조리 스크랩해서 분석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의원 한 명 한 명을 바둑돌 하나로 만들어 국회(國會)라는 이름의 한 판의 여야(與野) 바둑을 둘 수 있다. 의원(議員) 한 점의 행마는 각 지역구라는 또 다른 한판의 바둑에 등장하는 후원회나 지역 민심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된다. 소셜미디어를 포함하여 온라인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생각의 파편들은, 민심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이터가 된다. 지역구라는 한판의 바둑이 의원 한 점(點)을 만들고, 의원 한 점은 다시 국회라는 한판의 바둑을 만든다. 예를 들어, 지역구라는 이름의 수백 개의 각 바둑판은 역시 각 수십만 판의 요약판이고, 국회라는 이름의 바둑판은 역시 수백 국회의원 바둑판의 데이터로부터 추출 구성되는 것이다. 수천 백 개의 은닉계층(hidden layer)들에 관한 연산의 결과로 나오는 출력계층(output layer)의 예측 결과는 다음 날 조간 신문 정치 1면의 기사와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의 미국 대통령 선거 때는 더 발달한 버전의 알파고가 더 많은 데이터를 연산하여 간단히 당선자를 맞춰낼 수 있을 것이다. 돈이든 데이터든, 구글(Google)이 가진 자원(資源)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혹은 무섭게도, 실수(失手)로 여겼던 알파고의 한 수가 승리 이후에는 묘수(妙手)로 분석되었듯, 알파고가 그리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한다면, 그때부터는 사람들은 그렇게 되리라 믿을 것이고 쏠림 현상은 가속될 것이다. 믿을 수밖에 없다. 그 정도의 자원과 자료를 스스로 갖추고 있지 않으면 검증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다. 알파고 대국 결과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범용(汎用) 인공지능은 더 성큼 인간종(種)의 영역에 들어올 것이다 싶었다.

신공지능(神工知能)으로서의 인간

알파고 대국 당시 내가 했던 위 생각을 딥마인드 프로젝트팀들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알파제로(AlphaZero) 프로젝트의 수석 연구원 데이비드 실버가 했던, 타불라 라사 학습(tabula rasa,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학습)에 관한 말을 인용하여 적고 있다.

“타불라 라사 학습을 구현할 수 있다면, 바둑에서 그 밖의 어떤 영역으로든 옮겨 심을 수 있는 동인(動因)을 확보한 셈입니다. 저희는 지금 다루고 있는 영역의 세부 사항에서 벗어나, 보편성이 워낙 높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알고리듬을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저희가 알파고를 만든 목적은 기계가 인간을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연구하는 일의 의미를 발견하고 프로그램 혼자서 지식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150쪽) 이미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로서는 반갑고 덜 외로운 일이지만 그 예측 불가능과 통제 불가능 때문에 걱정도 생긴다. 설명은 가능하나 예측은 불가능한 결정을 내리는 인공지능은 그가 가진 힘과 권력에 비추어 시시한 변덕이나 버그(bug)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앞으로 인간 대신 알고리듬이 결정을 내리는 일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문제는 속속 등장하는 기계 학습 알고리듬이 만든 의사결정 분지도를 인간이 검토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는 새로운 프로그래밍 방식의 한계다. 사실 우리는 알고리듬이 왜 이런 특정 결정을 내렸는지 잘 모른다. 게다가 그 결정이 실수가 아니라 아주 기발하고 적절한 제안이라고 어떻게 우리는 확신할 수 있겠는가? 많은 바둑 해설자는 제2국에서 알파고의 제37수를 어떻게 봐야 할지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고 나중에야 그 수가 대국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알고리듬이 하는 일은 게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알고리듬은 실제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215쪽)

예를 들자면, “스팸 필터 알고리듬은 구체적으로 분류되지 않은 메일로 훈련을 시작했지만, 사용자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 사람의 관심사를 파악하게 된다. 즉 사용자의 메일 분류 방식에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141쪽). 연인끼리 사귀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데이트 횟수가 늘어날수록 상대에 대한 데이터는 쌓인다. 처음 본 순간 무한대의 호감과 설레임은 점점 더 신뢰와 존경으로 변하거나 반대로 싸늘히 식는다. 한편 법조 분야에서 소송을 통해 판결을 받는 방법은 이와 반대다. 재판장은 원고와 피고에 대한 신뢰 제로의 상태에서(선입견과 예단이 없는 상태에서) 재판 절차를 시작한다. 주장을 듣고 이에 부합하는 증거의 가치와 증명력을 따지면서 조금씩 판단의 저울추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특정 판사가 그간 내린 판결들에 대하여 좀 더 데이터가 쌓이기 시작하면, ‘○○ 판사로부터 승소 판결 받는 알고리듬’이 가능해지게 될 테다.

“알고리듬 중 상당수는 구현방식이 매우 결정론적이었다. 인간이 어떤 문제의 해결책을 알아내고서 프로그램을 짜 놓으면, 컴퓨터는 프로그램으로 지시받은 일을 노예처럼 수행해 나갔다.”(143쪽) 기계가 학습할 수는 있지만 기계가 제대로 학습하는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었다. “이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게 된다. 데이터를 활용해 훈련을 쌓은 알고리듬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출 승인 여부를 결정하고, 치안 유지를 위한 판단을 내리고, 건강에 대해 조언하는 업무를 알고리듬이 대체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알고리듬이 갖자기 잠재적 편향을 내재한다는 증거 역시 많다.”(145쪽)

알고리듬을 두고 인공(人工)지능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인간을 흉내 내 인간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이 만들었으니 신공지능(神工知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인공지능은 판단자가 인간이라는 점을 이미 전제로 하고 있다. 예술은 타자(他者)의 의식을 그의 표현을 통하여 이해하는 방식이다. 시각적일 수도 있고 청각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 파울 클레(Paul Klee)”(189쪽). ‘인공지능이 예술적 창의력을 가진다’고 말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알고리듬이 창의적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알고리듬이 정말 창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게다가 그 창조의 과정이 재현 가능해야 하고(하드웨어의 오류로 우연히 생긴 결과가 아니어야 하고), 프로그래머는 알고리듬이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 없어야 한다. 기계가 정말 창조적이라고 인정받으려면 코드 작성자나 데이터 세트 구축자의 창조력이 표출된 것 이상의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21쪽) “16세기 중반에 ‘–1의 제곱근’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다. 제곱이 음수인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이터만 입력된 컴퓨터가 –1의 제곱근이라는 개념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29쪽.)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는 탄생 초기에는 당대의 수학자들이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의 수학에서는 필요불가결한 개념이다. 현재 모든 수학증명을 코드화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언젠가는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추측이나 증명을 내어놓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다른 한편,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로봇 3원칙 중 1원칙(‘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을 저버리는 ‘창조적’인 알고리듬도 등장하지 않을까. 영화 ‘터미네이터’ 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스카이넷(Skynet)은 이미 ‘창조적’(?)인 것일까.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는 거꾸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哲學)적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에 대한 분석이 정밀할수록 인공지능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과 통찰을 가지게 된다.

저자 : 김상순

現 법무법인(유) 클라스 파트너 변호사 現 국토교통부 고문변호사 前 방송통신위원회 장관정책보좌관 前 대법원 사법정보화전략위원회 위원 前 이화여대 로스쿨 / 중앙대 로스쿨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