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이 기존 비즈니스를 파괴한다’ – ‘디커플링’ 서평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위기에 놓인 미디어 기업을 탐방한 뒤, 공들여 사례연구 보고서를 작성했다. 스스로 보고서 내용에 뿌듯해 했지만, 정작 해당 기업은 발표해서는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수익이 급감하던 또다른 통신 기업에 대한 보고서도 발표가 거부됐다. 대체 왜?

‘왜 기업 임원들은 디스럽션(disruption)에 대해 힘들어하는 걸까? 대응 방법은 알지만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디스럽션(disruption) 앞에서 두 손을 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걸까?’

탈레스 테이셰이라 교수가 <디커플링>이라는 책을 내놓게 된 배경은 이런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의 도전으로 곤란에 처한 브라질 최대 미디어 기업 글로보의 사례연구가 묻혀버린 것은 2010년. 스카이프 등장 이후 국제전화 사업이 망가졌던 스페인 최대 통신회사 텔레포니카 사례연구도 같은 이유로 발표조차 못했다.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고급 비즈니스 컨설팅을 받고도 활용조차 못한 사태. 그는 이후 디스럽션(disruption)에 직면한 여러 대기업을 찾아가 비공개를 전제로 만났다. 사례연구 대신 기업이 직면한 파괴적 혼란의 정체가 무엇이고 기업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 결과물이 용어 정리 등을 제외하고 본문만 439쪽에 달하는 책이다. 교수가 스스로 호기심을 갖고 현장에서 답을 찾으며 오래 탐구한 저작 답게 생생한 사례로 가득하고 쉽게 읽힌다. 그는 8년여 소규모 스타트업은 물론, 에어비앤비,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을 방문했고, 닛산, 지멘스, 코카콜라, 디즈니, 월마트 등 수백 개 기업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시장을 바꾸는 패턴을 발견했다. 고객이 제품을 탐색하고 평가하고 구매하고 사용하는 일련의 소비 과정에서 약한 고리를 끊고 들어가 그 지점을 장악하는 ‘디커플링’이다. 학자와 컨설턴트들은 판에 박힌 듯이 시장 파괴의 주요 원인으로 ‘기술’을 말하지만, 테이셰이라 교수는 “시장 파괴의 주범은 기술이 아닌 고객”이라고 단언한다. 기존 기업들은 기술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혁신, 비즈니스 모델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우리나라 쏘카와 비슷한 차량 공유 회사 집카는 차량 구매하기와 운전하기를 연결하는 사슬, 차량 운전하기와 유지하기 사이의 연결고리를 깨트렸다. 우버나 중국의 디디추싱 같은 ‘라이드 헤일링’ 서비스는 차로 이동하는 것과 차를 소유, 운전하는 것을 분리했다. P2P 해외송금 서비스 트랜스퍼와이즈는 전통적 환전 과정의 일부 고리를 깨트렸다. 게임을 개발하지 않고 오직 ‘게임 플레이 구경하기’ 단계만 제공한 트위치는 10억 달러에 아마존에 인수됐다. 이것은 고객의 선택이다. 디커플링이 발생하면 고객들은 광고 시청이나 차량 유지처럼 소비 가치사슬에서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부분을 없애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요구할 능력을 얻게 된다. 선택권을 갖게 된 고객들의 소비가 달라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국민이 주권자로서 각성하듯, 고객이 시장의 모든 걸 바꿔버리고 있다. 일종의 민주화가 산업계에도 진행되고 있는 셈일까. 기득권 기업이 해오던 대로 하다 가는 망하기 십상이다. 고객이 먼저다.

단순한 고객의 변덕이 아니라 모든 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 두자. 디지털 시대는 기술 변화를 기반으로 모든 걸 파괴적으로 빠르게 바꾼다. 어떤 기업들은 스스로 디커플링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나 ‘충족되지 않은 소비자 욕구를 감지하고 그저 직관적으로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을 뿐’이었다.

기업들의 고민을 마주하고 여러 사례를 쫓아다닌 테이셰이라 교수의 이 책이 고마운 것은 꼭 필요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학자가 이론으로 연구한 게 아니라 발로 뛰면서 답을 찾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신생 기업은 기존 기업을 불시에 따라잡는다. 어느 쪽이든 디지털 비즈니스 혁신의 물결을 일찌감치 포착하는 것이 운명을 바꾼다. 또 디커플링을 제거하거나 디커플링을 하려는 상대를 인수하려 하기보다는 그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할 방법을 찾으라 한다. 스타트업 하나를 없앨 수는 있지만 또다른 파괴적 비즈니스가 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기존 기업이든 신생 기업이든 가능한 디커플링 5단계 공식’도 제시한다. 고객들이 자신의 요구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행동 변화가 시장을 파괴한다면? ‘패기 넘치는 디커플러라면 다른 경쟁자보다 한발 앞서서 고객 가치사슬 활동 중 하나 이상을 낚아챌 기회를 찾아내야’ 하며, 1단계는 ‘타깃 세그먼트의 고객 가치사슬을 파악’하는 것이다. 대충 하던 대로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사람들은 실제 언제 새 차를 필요로 하는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자동차 브랜드를 파악하는가? 어떻게 특정 제품이나 모델에 관심을 갖게 되는가? 테이셰이라 교수는 “인식, 관심, 욕망, 구매 과정을 일방적이고 엉성하게 생각하면 구체성이 떨어져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2단계는 고객 가치사슬을 가치 유형별로 분류하고, 3단계 고객 가치사슬 중 약한 부분을 찾고, 4단계 약한 사슬을 분리한다. 성공적 디커플러는 소비 과정에서 금전, 노력, 시간을 줄여준다. 총비용 면에서 고객이 기존 기업에 지불하는 비용보다 덜 부담하게 만든다. 5단계 경쟁 기업의 반응을 예측할 것. 기존 기업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고 선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어차피 기존 기업은 파괴자가 분리한 것을 재결합하거나, 고객에게 분리할 기회를 직접 제공하는 선제적 조치에 나설 수밖에 없는데 이조차 미리 예측하고 시작하란 얘기다. 후자, 즉 기존 기업의 선제적 조치에서 ‘리밸런싱’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기존 기업은 무작정 디커플러로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을 위해 사업모델을 조정해야 한다. 예컨대 오프라인 매장 중심의 베스트바이는 아마존을 따라 가격을 낮추는 정책에 나섰지만 장기적 대책이 될 수는 없었다. 베스트바이는 대신 자사 매장에 주요 제조사들이 제품을 진열하게 하고 그 대가로 비용을 청구했다. 입점수수료 라는 가치를 확보하고 균형을 재조정한 것이다.

‘세상에 영원히 안전한 것은 없다’. 본체인 면도기를 저렴하게 판매하고 소모품인 면도날로 돈을 번 질레트는 한 때 미국 시장의 80%를 차지했다. 그러나 2011년 창업한 뒤 온라인으로 면도날을 제공한 달러셰이브클럽에게 끝내 온라인 시장 1위 자리를 내줬다. 이런 디커플러가 고객을 빼앗아갈 위험은 어떻게 평가하고 예측할 수 있을까. 기존 기업은 파괴자가 자신의 시장을 위협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면도기와 교체용 면도날을 연결하는 사슬이 끊어질 가능성은 사실 예측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질레트는 하지 않았다.

고객이 나의 시장을 떠나려 하는지 평가하는 것도 위험 예측의 중요한 과정이다. 고객의 구매 고려군에 계속 남아있을 수 있느냐가 관건. 고객이 새 중형차를 찾을 때 GM이냐 다른 경쟁사 제품이냐를 고민한다면 큰 혼란은 없다. 그런데 일부 고객이 전기자동차냐 휘발유차량이냐를 고민한다면 구매 고려군이 조금 달라진다. GM의 위험은 조금 더 높아진다. 자율주행차까지 검토 옵션에 들어가면 또 달라진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파괴적 혼란은 기술 혁신보다는 비즈니스 모델에서 발생한다. 자동차 구입이냐, 혹은 우버냐. 고객이 ‘차를 꼭 사야 하나?’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GM은 가장 큰 위험을 맞을 수밖에 없다. 비즈니스 모델 혁신은 고객에게 비싸고 새로운 ‘하드웨어’ 기술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더 빨리 확산된다. GM은 전기차와 자율주행차를 개발해야 하는지, 얼마나 빨리 개발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지만 소비자가 디커플러로서 ‘내가 그 범주의 제품을 꼭 구입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통제력이 약해진다. 고객이 디커플링을 시도하려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지 확인하려면 구매 고려군의 변화 양상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이처럼 미리 위험을 예측하고 리밸런싱 등의 전략을 택하는 것은 파괴적 혁신에 맞서는 기존 기업의 수성 전략. 책은 친절하게도 디커플링을 통해 기업을 시작하는 이들에 대한 팁도 빼놓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에서 통용되는 주문 중 하나는 현재 시장에 있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 네트워크 효과와 기술 인프라 구축 등도 다 좋은 얘기다. 그러나 쉽지 않다. 결국 디커플링 이론에 따르면 고객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욱 극단적으로, 더욱 세밀하게 고객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발로 뛰면서 첫 고객을 대량으로 확보하려는 노력, 경쟁기업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전략, 초기 고객들을 키우는 방법 등이 생생한 사례를 통해 소개된다. ‘첫 고객 천 명 확보하기’, ‘천 명의 고객에서 백만 명의 고객’을 만드는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길이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고객이 변한다는 사실, 기업도 고객과 함께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전달된다.

2016년 기준 미국에서 발생한 지출의 94%는 ‘빅세븐’이라 부르는 범주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즉 어디에서 살 것인가(주거, 가정용품, 유지 관리),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항공 및 육상 교통), 무엇을 먹을 것인가(음식과 음료, 음식 준비), 무엇을 입을 것인가(패션, 화장품, 몸치장), 어떻게 배울 것인가(정규 및 비공식 교육), 어떻게 즐길 것인가(미디어, 전자, 스포츠), 어떻게 자신을 치유할 것인가(건강관리, 신체적 및 정신적 치료) 등 7가지 범주를 살펴서 변화의 징후를 찾으란 조언도 새삼 흥미롭다.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기업의 흥망성쇠는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단숨에 시장을 점령하거나 밀려난 기업들의 이야기를 ‘디커플링’ 관점에서 보면 또 새롭다. 기존 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고객만 봐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저자 : 정혜승

디지털 정책가/(전)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전)카카오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