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하라” – 인터넷 감시 위협에 맞선 테제
1. 사이버 망명의 유행
망명(亡命)은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거나 억압당할 위험이 있는 시민이 현 국가를 버리고 다른 국가로 이주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때 망명은 기존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살아갈만한 사회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내포한다. 따라서 망명을 선택하고 실현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친숙한 환경과 그동안 구축한 관계들 및 성과들을 모두 뒤로 한 채, 새로운 국가에 편입되기 위해 오랜 시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할뿐만 아니라 난민이 될 위험성도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이버 공간에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사이버 공간에서 망명은 보다 즉각적이고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망명이 현실 세계에서만큼 큰 결심을 요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감시와 검열이 그만큼 빈번히 그리고 위협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이버 공간에서 시민들은 자신에게 가해지거나 가해질지도 모르는 감시와 검열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에 맞서 즉각적으로 망명지를 모색하고 망명을 실천한다. 사이버 공간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 된 지금, 대대적인 사이버 망명은 감시와 검열에 맞선 시민들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이자 살아갈만한 사이버 공간과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사례가 되고 있다.
2. 망명을 부르는 감시의 위협
2014년 한국 사회는 대대적인 사이버 망명 현상을 경험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2014년 6월 검찰은 세월호 집회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메신저인 카카오톡 계정을 압수수색했고, 이때 3000명에 달하는 개인 정보가 무단으로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 검찰이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는 ‘사이버상 허위 사실 유포 사범’을 엄벌하겠다는 수사 방침까지 발표하자, 시민들은 대대적으로 독일에 서버를 둔 메신저 텔레그램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약 한 달 사이에 텔레그램 이용자는 4만 명에서 170만 명 이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것은 검찰이 ‘사회적 분열’을 막아야한다는 명목 하에 언제든 나의 사적인 공간을 무단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과 기존에 머물던 사이버 공간이 더 이상 나의 프라이버시, 즉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존재할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없다는 불신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사실 이와 같은 대대적인 사이버 망명 현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8년에 우리는 이미 집단적인 사이버 망명 현상을 경험했다.
2008년 8월 촛불시위가 불붙기 시작할 무렵 인터넷 사이트는 (오프라인에서와 같이)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공론장으로 기능했다. 이때 시민 대다수가 이용하던 포털 사이트에서 반정부 성향의 글들이 무단으로 삭제되고 친정부 성향의 기사들만 편집되어 올라오는 일들이 발생했고, 이것은 곧 집단적인 사이트 회원 탈퇴로 이어졌다.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대적인 사이버 망명 현상이었다. 당시 시민들은 집단적으로 한국의 대형 포털사이트를 떠나 정부가 검열하거나 관여할 수 없는 외국의 포털 사이트나 메일 계정으로 망명했고, 온라인 토론장을 직접 개설하기도 했다. 2008년과 2014년, 이 두 번의 대대적인 사이버 망명 현상이 보여주듯이 시민들은 자신의 삶이 위협당한다고 직접적으로 느낄 때 집단적으로 망명을 선택했다. 사이버 공간에 국경이 없다거나 망명 절차가 단순하다는 것은 배경일 뿐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사이버 망명은 2003년도에 인터넷 실명제가 실시되자 인터넷 규제를 피하려는 우회로의 하나로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 사이버 망명을 선택하는 시민들은 많지 않았다. 망명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듯이 익숙한 국내 사이트를 떠나 외국 사이트를 이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국어와 친숙한 사용 환경, 그리고 오랜 시간 상호작용한 이웃들과 그들로부터 얻은, 인터넷에서 가장 중요한 명성을 포기해야함을 의미”했다.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 세상에서도 망명은 높은 전환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만큼 절실한 동기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이버 공간에서도 망명은 떠나게 만드는 ‘절실한 동기’가 있을 때 행해졌다.
사이버 공간에서 나의 삶이 감시당하고 있으며 나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내 말이 왜곡되고, 감추고 싶은 관계와 정보들이 노출될 수도 있다는 위협이 있을 때, 비로써 시민들은 의외로 높은 전환비용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망명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대대적인 사이버 망명 현상은 현 사이버 공간 및 그것을 둘러싼 사회에 시민들을 머물지 못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 즉 변화가 필요하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사이버 망명은 그 변화를 촉구하는 적극적인 정치 행위가 된다.
3. 사이버 망명, 새로운 길의 모색
근대 시민권의 대전제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의 성립이었다.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분제도와 세계가 무너져야 했기 때문에,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으로 존재하려는 의지는 항상 기존 세계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대립과 불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근대 사회로 접어들었고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과연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으로 존재하는가.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근대 사회는 국가가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 감시와 통제는 국경이 없는 사이버 공간에서도 폭넓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가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듯이 시민 역시 국가를 감시하고 통제할 때 우리는 보다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국가 안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감시와 사찰의 위협을 느낄 때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지금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일은 시민들인 바로 우리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사이버 사찰과 감시에 맞서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망명을 행하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텔레그램으로의 대대적인 망명은 카카오톡의 개인 정보 보호 방침을 변화시켰고 사이버 사찰 방지 목적의 법안을 발의시키는 움직임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후에 이 흐름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것 역시 우리의 몫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감시의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맞선 행동을 만들어가는 것, 문제제기와 새로운 길의 모색으로서의 사이버 망명이 끊임없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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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조동원(2010). 반감시 놀이: 사이버 망명, 사이버 자살, 사이버 교란, 해킹 행동주의. <인권오름>. Available :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weekly&id=1508&page=1&category3=215
2. 한혜경 외(2011). 인터넷 실명제와 우회로의 선택 : 인터넷 공론장 참여자들의 자기 검열과 우회로 선택의향을 중심으로. 『한국언론정보학보』, Vol 55, 50-73.
3. 한흥구 외(2012). 『감시사회』. 서울. 철수와 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