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펑크: 어산지,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다
<도서 정보>
제목: 사이퍼펑크: 어산지,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다
원제: Cypherpunks: Freedom and the Future of the Internet
저자: 줄리언 어산지, 제이컵 아펠바움, 앤디 뮐러마군, 제레미 지메르망
역자: 박세연
출판사: 열린책들
출간일: 2014년 3월 25일
우리나라 인터넷 서비스의 상용화는 1994년 6월에 시작됐으니 정확히 20년 전 일이다. 그 때는 온통 장밋빛 전망이었다. 인터넷이 곧 바꾼다는 세상에 열광했고 인터넷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쏟아졌다. 당시 21세기 인류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풀이말은 곧 인터넷이었고, 인터넷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는 인터넷이 사회적 생존의 필수조건이 돼 버린 현재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이 주는 생활의 편리함과 경제적 가치는 연일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인터넷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곧 인류의 발전이라는 신화가 더욱 공고히 되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인터넷 이용의 일상화로 인해 우리를 더욱 은밀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 소위 ‘빅 브라더(Big Brother)’에 대한 논의는 공론의 장에서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 번역 출간된 <사이퍼펑크: 어산지,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다>는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이 책은 현재 영국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2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하고 있는 위키리크스(Wikileaks)의 줄리언 어산지(Julian Assange)를 비롯해 제이컵 아펠바움(Jacob Appelbaum), 앤디 뮐러마군(Andy Müller-Maguhn), 제레미 지메르망(Jérémie Zimmermann)이라는 우리 시대 걸출한 디지털 인본주의자들의 2012년 3월 토론을 정리하고 있다. 제목인 ‘사이퍼펑크(cypherpunk)’는 암호(cipher)에 저항을 상징하는 펑크(punk)를 붙여서 만든 합성어로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암호 기술 및 이와 유사한 방법을 활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디지털 인본주의자 또는 사이퍼펑크로서 이들의 문제인식은 현재 인터넷이 전체주의의 도구가 돼버려 인류 문명을 위협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커뮤니케이션 자유와 정보 평등을 통해 해방의 도구가 될 것으로 믿겨졌던 인터넷이 지금에 와보니 정부나 기업 등 강자를 위한 감시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인터넷 테크놀로지의 편안함과 현란함에 취해 있는 동안 개인에 대한 감시가 은밀하게 진행돼 온 측면은 분명히 있다. 직접적인 실시간 감시가 아니더라도 인터넷 생태계를 지배하는 정부나 기업 등이 개인의 인터넷 이용 정보 혹은 흔적을 고스란히 축적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필요에 의해서 혹은 특정 의도에 의해서 이들 이용 정보 혹은 흔적은 정부나 기업 등이 원하는 형태로 얼마든지 추출될 수 있다. 전면적인 감시의 일상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어산지는 이 점을 매우 우려한다. 이 책에서 “앞으로 몇 년 동안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진다면, 세계 문명은 포스트모던 감시 디스토피아로 전락할 것이며, 첨단 기술을 이해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인터넷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감시를 통한 통제가 용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흐름이 자유롭고 가치중립적이라는 착각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에 따르면 인터넷 망의 물리적 기반을 잘 생각해보면 이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터넷 망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려면 광케이블, 인공위성, 인터넷서버 등을 얘기해야 하는데 이는 모두 이용자 개인이 아닌, 정부나 기업 등이 운영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개인에게 강제력 혹은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인터넷은 매우 효과적인 도구다.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개인을 강제하는 권력의 원천은 커뮤니케이션 정보에 있고 이는 감시를 통해서 확보된다. 이 때문에 모든 국가에는 예외 없이 감시 조직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한다. 인터넷 이용의 일상화로 커뮤니케이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감시는 더욱 수월해졌다. 이전에는 사적 영역으로 온전한 감시가 불가능했던 개인 커뮤니케이션 정보도 인터넷에서는 고스란히 축적되고 있어 대규모 감시가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그 동안 인터넷에 대해 권력자가 가졌던 두려움, 즉 인터넷을 이용함으로써 대중이 현실과 변화의 상황을 파악하고 이로 인해 상호교류를 제한하는 권력자의 강제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 기우에 불과했다고 본다. 이는 사실 다른 테크놀로지와 마찬가지로 인터넷도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에 근거한다. 테크놀로지로서 인터넷도 권력을 중심으로 한 상호작용이나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현재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이용하는 콘텐츠나 서비스는 대부분 민간 기업이 제공한 것이다. 유․무료에 관계없이 이들 콘텐츠나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 많은 개인 정보를 민간 기업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용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개인 정보가 자동으로 전달되기 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들이 보기에 현재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감시는 민간 기업의 활동이다. 그들은 민간 기업이 이용자가 별 생각 없이 제공한 개인 정보를 가지고 ‘민영 비밀경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민간 기업이 “정부와 손을 잡고 그들의 사용자를 팔아넘기고,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통제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정부에 저항하기보다는 감시 문화와 통제 문화의 일부가 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민간 기업이라고 봤다. 한편 저자들은 인터넷 이용으로 인해 국가 경제 영역에서도 감시 체계가 강화됐다고 말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정부는 화폐의 흐름을 결정하는데, 이를 통해 국가 수입 증대는 물론이고 국민의 경제 활동을 통제할 수 있다. 현재는 인터넷을 통해 거의 모든 경제 활동에 대한 정보가 수집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한 경제 활동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통제가 더욱 용이해졌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커뮤니케이션 자유와 정보 평등이라는 인터넷의 가능성은 사실 정치 영역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민주주의에서 필요한 정치 정보의 습득, 공유, 실천 등이 용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치 도구로서 인터넷은 정치 참여를 수월하게 한다. 저자들은 “정치 집단이나 언론, 기업, 혹은 과거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했던 모든 집중화된 조직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정치 시스템”, 즉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또한 인터넷을 잘못된 정치적 판단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기반으로 보기도 한다. 즉 인터넷 이용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현재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이러한 법안들을 계속 추진하고, 법률로 통과시키고, 피통치자들의 동의 없이 시행하기는 대단히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 도구로서 인터넷의 이용에서도 집중화 경향을 볼 수 있다. 특히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특정 인터넷 서비스가 집중적으로 이용되는 현실은 중앙 집중적 통제와 권력 남용을 용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저자들은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분산화된 정치적 운동”을 강조하고 있다.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 자유와 정보 평등을 보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실은 정부나 기업 등 강자를 위한 감시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최근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다. 많은 국가의 정부가 안보를 위해 인터넷에서 개인 정보를 수집해 분석한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많은 기업은 콘텐츠나 서비스 또는 제품의 마케팅 및 프로모션을 위해 개인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빅 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 서비스(Cloud Service)’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정보 프라이버시(Information Privacy)’, ‘잊힐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 등이 최신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저자들은 정부나 기업 등의 이러한 전면적 감시에 대체하는 방안을 두 가지로 제안한다. 하나는 “물리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법칙”이다. 물리적 법칙은 “실질적으로 감시를 방지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하는 방안이고, 인간의 법칙은 “영장 등의 의무 규정과 규제 단속을 강화함으로써 법률을 통한 민주적 통제를 구현”하는 것이다. 사실 이들 물리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은 동시에 고려돼야 효과적이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감시에 대체하는 “기술들을 개발하는 동안, 이와 관련된 법과 도구들이 시민들의 손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기술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통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또한 시민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하기 위해서”다.
인터넷 환경이 편재됨으로써 인터넷 이용이 일상화돼 버린 현재 인터넷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게 된 현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부나 기업 등의 감시가 증가했다는 것 이외에 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한 강조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이용 초기 우리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입증되지 않았던, 아니 사실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테크놀로지의 가치중립성을 믿었다. 순진하게도 “기존의 국가 시스템이 인터넷과 결합하면서 국가의 본질이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현재도 국가는 커뮤니케이션 정보를 감시함으로써 사회 구성원 개인에게 강제력 혹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제는 기업의 감시도 국가 차원을 넘어서고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사이퍼펑크답게 미래의 감시 디스토피아에 대한 유일한 현실적 대책으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방안을 스스로 모색하는 것”을 꼽았다. 암호화로 대표되는 이러한 대책을 통해 국가의 강제력이 미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은 원론적인 대책은 점점 수준과 강도를 더해 가고 있는 국가나 기업 등의 대규모 인터넷 감시에 대한 경고와 다름없다.
지금도 어산지는 사이퍼펑크의 전통적 모토인 “약자에게 프라이버시를, 강자에게 투명성을(Privacy for the Weak, Transparency for the Powerful)”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정부나 기업 등 인터넷 강자의 감시로부터 미래 인터넷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들은 “정부든 기업이든 간에, 어떤 세력이 보편적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제약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인터넷 세상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나 기업 등의 인터넷 감시가 앞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감시를 견제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바로 비판적 인터넷 이용자라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경제적 의사결정을 통해 정부나 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점에 근거한다. 다른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보편적 인터넷 이용 역시 이용자의 관심과 수준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이 토론을 훔쳐보는 동안 찾아왔던 불편함이 저자이자 사이퍼펑크인 어산지, 아펠바움, 뮐러마군 그리고 지메르망에게 진 빚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