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이용자가 세상을 바꾼다 : ‘망중립성을 말하다’ 리뷰
제 목: 망중립성을 말하다
저 자: 망중립성이용자포럼
출판사: 블로터앤미디어
출간일: 2013년 1월 30일
“고속도로 회사가 ‘롯데’와의 사이가 틀어져서 ‘롯데 껌’을 씹거나 소지하고 있는 차량은 통행을 금지한다고 해보자. 도로 표면에 눌러 붙은 껌 때문에 도로유지 비용이 증가해서 그렇다고. 위험한 폭발물을 탑재하고 있는 경우는 몰라도 왜 껌이 단속대상인지 납득되지 않고, 왜 유독 롯데인지, 그리고 경찰이 아니라 고속도로 회사가 이러는 것이 가능이나 한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롯데 껌’ 소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고속도로 모든 차량에 대하여 거대한 투시기계로 차량 내부를 샅샅이 분석하고 있다고 해보자. 차량 트렁크 내용물은 물론 탑승객의 신체 및 소지품, 심지어 타이어 표면이나 차량 카펫에 떨어진 부스러기 성분까지도 분석…이러한 가정적 예시들은 모두 말도 안 되는 것들이라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 이렇듯 황당한 상황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인터넷에서 연출되고 있고, 그 논의가 바로 ‘망중립성’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228~229쪽)
망중립성, 그리고 망차단 기술인 심층패킷분석(DPI-Deep Packet Inspection)에 대해 이렇게 명쾌한 비유라니. “이게 망중립성이야. 정신 차려”라는 오길영 신경대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들어는 봤어도 도무지 뭔 소리인지 어려운 ‘망중립성’. 망(Net)은 중립(Neutrality)적이며 어떠한 콘텐츠나 어플리케이션, 서비스를 차별하거나 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뭐? 망을 가진 통신사나 망이 없는 포털들이 티격태격 하는 것 아닌가? 결국 밥그릇 싸움 아닌가? 책은 이렇듯 별 관심 없는 세상에 일갈한다. 이것은 망을 이용해 인터넷을 하고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에게 중대한 문제라고. 마치 껌 하나로 고속도로 통행이 제한되듯,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이용자가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지난 몇 년 간 국내 망중립성 논의 과정에서 가장 의미 있고 흥미로운 움직임은 ‘망중립성이용자포럼’의 등장이다. 데이터 요금 다 냈는데 왜 통신사가 마음대로 무료통화라는 특정 서비스만 제한하는지 따져 묻던 이용자들이 2011년 말 뭉쳤다. 경실련, 민주언론시민연합,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언론개혁시민연대, 인터넷주인찾기, 진보네트워크센터, 오픈넷, 참여연대, 청년경제민주화연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함께하는 시민행동 등 10개 단체가 함께 한다. 저마다 색깔이 살짝 다른 분들이 저렇게 뜻을 모으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활동도 대단했다. 토론회를 열고, 성명을 내고, 법적 대응을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강좌나 오픈세미나를 통해 끊임없이 ‘이용자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내용’을 나누고 연구했다. 포털의 정책 담당자로서 이런 과정 구경은 했지만, 급기야 이런 책까지 낼 줄 몰랐다.
고백하자면, 나름 망중립성 좀 아는 척 해온 것이 부끄럽다. 망 강대국의 ‘흑역사’랄까. 처음 마주하는 팩트들이 적지 않다. 2G 시대에 이동통신회사들이 콘텐츠를 통제하여 생태계를 위축시킨 내용이야 대략 유명하지만 블로거 써머즈의 친절하고 적나라한 글은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 종량제와 망중립성 공방이 이렇게 닮았는지 몰랐다. 트래픽 급증에다 수익 악화로 투자가 어려우니 종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들 했지만 사실과 달랐다. 2003년 트래픽이 전년 대비 2배 가까이 늘어났어도 영업이익은 여전히 50%를 웃돌았다. 늘 트래픽이 문제라고 했지만, 사실은 트래픽 분산을 막고 과부하를 자초하는 상호접속 구조를 통신사들이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상호접속 방식 탓에 우리나라 망 이용대가가 과도하게 높다는 것은 어떤가. 시장 왜곡으로 미국에서 2006~2009년 중계접속료 단가가 1Mbps 당 50달러에서 9달러로 거의 20% 미만 수준으로 떨어진 반면 우리나라는 50% 수준에서 인하되는데 머물렀다. 전응휘 녹색소비자연대 상임이사는 “국내 콘텐츠 제공사업자는 이미 과도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며 “상황이 이러함에도 인터넷접속서비스사업자가 콘텐츠사업자에게, 예컨대 KT가 포털사에게 추가적인 망 이용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이 지경이 되도록 뭐했냐고? 블로거 민노씨의 뼈아픈 지적도 나오는데 “망사업자의 압도적인 화력(정보력과 자본력)에 밀려 포털과 신흥 서비스 사업자의 반격은 지리멸렬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답답했던 이용자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배경이랄까.
망중립성 논의의 중요한 한 축은 투명성. 현란한 마케팅 용어와 복잡한 요금제에 가려져 망 현황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게 문제다. 기술적 트래픽 관리의 필요성은 통신의 비용과 가격구조를 투명하고 실증적으로 분석한 이후에 논의될 수 있으나 이런 작업은 이뤄진 바 없다며 경제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강정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의 지적은 따끔하다. 특히 투명성은 왜 차단하느냐는 문제 뿐 아니라 어떻게 차단하느냐의 문제에서도 심각해진다. 현재 통신사가 카톡이나 마이피플 보이스톡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DPI 기술 탓이다.
“흔히 기술이 중립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술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특히 정치적이다…정치인은 시민을 위한다고 말하고 기업가는 이용자를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시민과 이용자는 논의에서 제외되거나 고려되어도 피상적 수준에 그친다. 이 글은 DPI가 이용자의 프라이버시와 공정한 인터넷 사용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음에도 이에 대한 단단하고 섬세한 논의가 담금질되지 못하는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197~198쪽)
공학박사인 강장묵 동국대 교수는 망에서 육두문자까지 걸러낼 수도 있는 DPI 기술의 특징을 나 같은 문과생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오길영 교수는 DPI가 어떻게 헌법에 반하는지, 더구나 국가정보원도 아닌 민간기업인 통신사에서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조목조목 따져준다. 대략 이해해왔으나 결과적으로 더 무서워졌고, 이건 아니다 싶다.
한편 투명성은 망중립성과 관련된 논의 과정 자체에서도 중요한 화두다. 김보라미 변호사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는 망중립성 관련 오픈인터넷 규칙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10만 건 이상의 서면 의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보고서, 코멘트, 소송기록, 워크샵 발언록들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캐나다도 DPI 관련 웹 게시판에 논의 과정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공론화를 촉진했고, 유럽연합도 마찬가지. 김 변호사는 국내 망중립성 논의 과정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방송통신위원회를 비판한다. 실상 이것은 대부분의 정부 부처, 사회 전반의 문제일 텐데,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확정되지 않은 ‘과정’은 공개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설익은 정책은 ‘필요한 오해’ 속에 공개 논의를 거쳐 개선될 수 있다는 지적은 곱씹어볼만 하다.
책은 각 챕터를 맡은 저자에 따라 난이도 등이 다르다. 어찌 보면 일관성이 없지만 아이스크림 가게 마냥 골라먹는 재미란 걸 더했다. 박리세윤 일러스트레이터와 장혜영 칼럼기고가의 반짝이는 재치는 삽화와 우화를 통해 이 책을 즐겁고 풍요롭게 해줬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 다양한 분들이 모여 왜 이런 수고를 했을까. 결국 통신비를 낮추거나 프라이버시 우려 없이 원하는 서비스를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깨어있는 이용자’. 이용자들의 나지막한 설명, 혹은 열정적 외침에 귀 기울이며 이런 생각해보면 감동까지 더한다. 넙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