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사회의 통제에 대한 용기 있는 물음 -올리버 스톤 감독의 <스노든>
아는 것처럼, 영화 <스노든>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아예 영화 제목이 논란이 되었던 사람의 이름이니, 나는 지금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먼저 스노든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 다음으로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 올리버 스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 이 질문을 하나로 합치면, 왜 올리버 스톤 감독은 스노든이라는 사람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바꾸어, 올리버 스톤은 스노든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했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그 대답이 결국 영화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영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은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5일 이후, 인터넷과 언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에서는 스노든을 모르는 이보다 아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스노든은 미국이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인사들을 감시하고 도청한다고 폭로했다. 폭로 이후 그는 미국의 감시와 통제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뒤 현재까지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다. 미국인들은 그를 사회 문제를 고발한 영웅으로 보기도 하고, 미국의 국익을 해친 범죄자로 보기도 한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바마는 그를 ‘단순한 해커’라고 명하면서 소환을 요구하고 있고, 트럼프는 더욱 과격하게 그의 죄를 따지고 든다. 사면초가의 스노든.
영화는 스노든의 이런 행적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올리버 스톤은 두 권의 책을 먼저 읽었다고 한다. 스노든이 하와이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후 NSA(미 국가안보국)의 기밀문서를 고발하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루크 하딩의 논픽션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와, 러시아 망명 후의 이야기인 아나톨리 쿠체레나의 소설 『타임 오브 더 옥토퍼스』이다.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에도 감독은 러시아로 건너가 스노든에게 몇 번이나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혹 잘못된 것이 있는지 세세히 점검한 것. 그렇게 해서 올리버 스톤은 ‘보수 청년’ 스노든이 왜 미국의 국익을 해칠 수도 있는 ‘내부고발자’가 되었는지 스크린으로 재현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스노든이 무엇 때문에 고발자가 되었던 걸까? 폭로에 어떤 희생이 따를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극적 구성을 위해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현되었다. 2013년 6월 5일 홍콩의 미라호텔에서 가디언지 기자 글렌 그린월드와 다큐멘터리 감독 로라 포이트라스가 스노든을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긴장을 자아내는 분위기 속에서 ‘접선’(?)에 성공한 이들은 스노든의 방에서 인터뷰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는 스노든의 플래시백이 전개된다. 군인 집안에서 자란 스노든은 9.11 테러를 목격한 후 이라크전에 참전하기 위해 그린베레에 지원하지만 사고로 의가사 제대를 한다. 그 후 정보기관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이며 승승장구한다. 감독이 이 부분에서 영화를 시작하는 의도는 명확하다. 스노든이 누구보다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자신의 정보로 미국의 안정도 지키고 세계 평화에도 기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특이하게도 올리버 스톤은 첫 번째 플래시백에서 스노든의 연인을 바로 소개한다. 사진 작가 린지 밀스. 인터넷에서 만난 이들은 첫 만남부터 서로가 진보와 보수의 성향으로 갈라지는 것을 인지한다. 그럼에도 서로에게 끌리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린지의 직업이다. 그녀는 반전(反戰) 주제의 사진을 주로 찍는 사진 작가이다. 당연히 발생하는 흥미로운 대조와 비교. 둘은 모두 카메라를 통해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스노든은 카메라로 타인의 삶을 사찰하고, 린지는 예술적으로 재현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표현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더 나아가, 스노든은 자신이 관찰한 것을 대상이 알지 못하도록 숨기지만, 린지는 대상을 포착해 전시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시선에서 권력이 발생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이런 시각의 차이처럼 이후 이들은 끊임없이 갈등하는데, 첫 만남에서부터 그 씨앗을 품고 있었다. 첫째 플래시백이 끝나는 초반 25분 정도에서 영화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이미 예고한다.
다시 홍콩의 현재로 돌아온 영화는 또 다시 스노든의 과거로 이동한다. 이렇게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스노든과 NSA의 행적을 보여주는 방식은 어쩌면 단순한 구성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교과서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현재와 과거를 오가던 구성은 과거에서 진행된 플래시백이 현재와 만나면서 본격적인 스릴을 서사한다. 미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내부고발자가 된 스노든은 이제 홍콩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를 도와주는 이들과 함께 하는 스노든을 보면서 우리는 세계 최강국의 비리를 고발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꾸준히 만들었던 올리버 스톤의 영화라는 점에서 <스노든>은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지만, <플래툰>, <7월 4일생>, <도어즈>, <JFK>, <닉슨> 등의 영화에 비교하면 극적 구성이 단순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스노든의 삶을 패턴화된 구성으로 연결하다보니 극적 긴장감과 긴박감이 상대적으로 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이미 다큐멘터리 <시티즌 포>를 통해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올리버 스톤은 이 사건을 극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관객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보하는 형식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즉 감독은 스노든의 입장을 차분히 보여주면서 당신이라면 이 정보화된 시대에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또는 스노든의 이 행동을 지지하는지 지지하지 않는지 이 스타일로 묻는 것이다.
결국 올리버 스톤은 9.11 테러를 겪은 이후 테러범을 사찰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인들을 감시하는 ‘빅브라더’ 시스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물었다. 점점 정보화되는 세상에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있는 것. 더 나아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외국인의 사생활을 아무런 제재 없이 들여다보는 것은 괜찮은지, 마치 전자게임을 하듯 드론으로 적국을 감시하면서 수시로 폭격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도 묻는다. 스노든은 그런 행위를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워하다가 간질에 걸릴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고 영화는 말한다.
마지막 생각. <스노든>을 보면서 미국인이 아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분단 상황 때문에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정보를 사찰하고 있을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렇게 정보를 수집하는 미국이 있어 우리가 안전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무작위로 수집되는 그 정보 때문에 프라이버시도 침범당하고, 무엇보다 그 많은 정보가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가?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NSA라고 할 수 있는 국가정보원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정작 해야 할 대북 정보는 수집하지 않고 선거에 개입해 댓글을 달고 개인을 사찰하는 이 기관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단지 스노든 같은 내부고발자가 등장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