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시간에서 ‘고립’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하여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 서울시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촉구하면서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다소 섬뜩한 경고와 함께 고난도의 행동수칙을 담고 있다. ‘혼자가 되어’ 지낸 2년 이상의 시간은 우리의 삶과 사회를 크게 바꿔놓았다. 소비 생활의 새로운 트렌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일인용 헤어숍, 일인 피트니스, 일인 세신숍 등 혼자서 이용하는 서비스 상품이 출현했다. 그리고 반려동물 인구가 늘어나면서 관련 시장도 크게 성장했다. 다른 한편 부정적인 현상도 두드러지는데, 고독사와 마약 중독이 늘어난 것이다. 쓸쓸한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약물에 의존하는 모습은 점점 깊어지는 고립을 극적으로 반영한다.
‘사회적 불황’이라는 말이 있다. ‘경제 활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불황’을 원용한 개념으로,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이 줄어드는 상황을 가리킨다. 지금 세상에서는 사회적 불황이 경제적 불황 못지않게 문제가 되고, 그 둘이 서로 맞물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기 쉽다. 가난이 외로움을 낳고, 소외가 깊어지면 경제 활동도 힘들어진다. 예전에는 물질적으로 쪼들려도 가족이나 이웃 간의 유대로 삶을 버티었는데, 이제는 빈곤한 계층일수록 고립이 심하고 그로 인해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일거리를 구하는 연결망이 끊기고 일상의 소소한 도움을 주고받는 이웃이 사라지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저소득층일수록 ‘나홀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소통능력이 감퇴하고 학력도 저하된다.
이것은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이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원자화되어가는 미국인들의 삶을 묘사한 [나홀로 볼링](2000년 출간)에서처럼, 사회적 단절은 많은 선진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영국도 2018년 정부에 외로움 담당 부서를 설치하고 고위급 책임자(minister : 한국의 언론에서는 ‘장관’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장관(Secretary of state) 밑에 있는 여러 부장관 가운데 하나이다)도 임명하여 신선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러한 정책이 수립된 데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가 2020년 출간한 [고립의 시대]는 갈수록 파편화되어가는 인간관계의 풍경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원제가 ‘The Lonely Century’인데, 21세기에 접어들어 사람들이 격하게 외로워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외로움은 단지 정서적인 불편함에 머물지 않고 신체적인 면역력도 떨어뜨린다. 외로움은 불안을 수반하고 높은 각성 상태에 오래 머물게 하면서 회복을 더디게 하기 때문이다. 건강과 질병의 사회적 요인에 대해 논구한 켈리 하딩의 [다정함의 과학]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전혀 접촉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해롭다고 한다. 그런데 부작용은 개인의 불행에 머물지 않는다. [고립의 시대]에서 소개하는 동물실험이 흥미롭다. 생쥐를 고립된 공간에 가두어 놓고 행동의 변화를 관찰했는데, 혼자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공격적으로 변화했다. 외로운 마음은 오로지 자기 보존에만 몰두하면서 고통받는 타인에 둔감해지고 혹시 모를 위협 요소를 찾아 주변 탐색하기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바로 그러한 메커니즘이 외로운 군중이 난폭해지면서 엉뚱한 대상에 적대감을 쏟아내는 현상을 설명해준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나치즘을 추종한 사람들의 “주요 특성은 야만과 퇴보가 아닌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에 있고, “사회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개인적 자아를 투항함으로써 목적의식과 자긍심을 되찾으려 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분석을 인용한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에서 수많은 백인 노동자 남성들이 트럼프라는 우파 포퓰리스트를 맹목적으로 지지했던 까닭도 사회적 지위가 낮아졌다고 느끼면서 자긍심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로움은 정치적 극단주의로 치닫는 일부 집단에 국한된 경험이 아니다. 점점 거대해지는 도시에서 우리는 엄청나게 밀집해 살면서도 서로에게 차갑게 소외되어 있다. 또한 SNS로 늘 접속해 있으면서도 일상은 종종 공허감에 휩싸인다. 분주하게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마음을 나누지는 못하고, 타인들이 연출하고 전시하는 이미지의 소비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먹방이 소개되고 있는데, 유튜버가 식사하는 모습을 시청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성 경험의 시뮬레이션이라고 한다. 시청자가 별풍선을 보내면 화면에 표시 화면이 뜨고 유튜버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해줄 때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렇듯 정서적인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 익숙해지다 보면, 실제로 우정을 맺는 것에 서툴게 될 수 있다.
미디어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삶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충실하게 맺어가는 능력이 감퇴하기 마련이다. 스마트폰이 생활의 필수품이 되면서 의사소통 능력의 손상은 아주 어린 나이에 시작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간결한 문자메시지만을 주고받는 가운데 상대방과 직접 대면하면서 감정을 섬세하게 파악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자기의 감정을 직면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휴대폰으로 주의를 돌리면서 회피해버리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역량의 결여는 사적인 인간관계는 물론 조직에서의 활동에도 막대한 지장을 준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느낀 미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표정 읽기 수업이 개설되기까지 했다.
이렇듯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마음과 사회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외로움을 해소시켜주는 상품과 서비스가 다양하게 출시되는 나오는 가운데, 급기야 소셜 로봇이 등장해 말벗 노릇을 해주고 돌봄 노동까지 수행한다. 고령자에게 인기가 있는 그 정서적 도우미들은 주인이 자신을 아무리 거칠게 대해도 절대로 짜증을 내지 않고 고분고분하다. 문제는 타자와 그런 관계만 맺다 보면 불친절과 무례함을 학습하게 되고, 타인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방식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갈등을 견디고 에고를 내려놓는 과정이기도 한데, 로봇 앞에서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견지해도 되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접어들어 급격하게 진행돼온 고립은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더욱 심화됐고, 그 후유증은 오래 갈 듯하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놀라운 탄력성과 회복력이 있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여러 만남이 활성화되고 있다. 하지만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다시피 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돌봄과 온정을 서로에게 베풀면서 민주주의를 연습하는 공간을 곳곳에 창출하자고 제안한다. 마을이나 회사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존재감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하는데, 구성원들 사이에 말문이 트이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조직에서 팀워크가 형성되면 업무의 성과도 높아진다.
타인에게 보이는 작은 관심과 일상에서 나누는 소소한 대화에서부터 새로운 연결의 실마리를 찾아가자는 <고립의 시대>의 제안은 한국사회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OECD가 2011년부터 발표해온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서 한국은 ‘공동체’ 부문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의 생존 경쟁에 전력투구한 결과 외형적인 성장의 측면에서는 선진국에 들어섰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리거나 파괴해버린 사회적 자본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인간적 유대와 신뢰를 복구 내지 생성해내지 않으면 우리의 삶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다.
고독해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이다. 그런데 ‘고독’이라는 단어에는 상이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두 글자에 각각 ‘립’(立)자를 붙여보자. ‘고립’과 ‘독립’이 된다.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등장한 개인은 <독립>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고 자기만의 인생을 향유하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 <고립>에 이르고 만다. 내면의 중심이 분명하게 세워진 사람만이 인간관계에서 자기중심성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모처럼 주어진 ‘고독’의 시간이 ‘고립’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을 훈련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도 한결 충실해진다. 자족의 넉넉함과 환대의 너그러움으로 상대방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홀로 있으면서 마음이 깊어지고 더불어 있으면서 삶이 넓어지는 즐거움, 그러한 격조와 품위를 빚어내면서 우리는 고립의 시대를 슬기롭게 건너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