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마노비치 저,『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도서 정보>
제목: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원제: Software Takes Command
저자: 레프 마노비치
역자: 이재현
출판사: 커뮤니케이션북스
출간일: 2014년 6월 27일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소프트웨어를 “저장장치에 저장된 특정한 목적의 하나 또는 다수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소프트웨어가 실행되고 저장되는 물리구조인 하드웨어와 반대 의미”라고 정의한다.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성된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사칙연산과 논리연산만 수행하는 단순한 기계에 불과해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다. 하드웨어가 이러한 연산을 순차적으로 수행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알고리즘이며, 이 알고리즘을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 것이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 또는 방식이 코딩이다. 소프트웨어는 이러한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이 구동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와 관련한 문서들로 구성된다. 컴퓨터 공학에 관심 없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는 지난 7월 23일 ‘소프트웨어 중심사회’를 선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개인,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좌우하고 있다며 ‘창조 경제’의 핵심으로 소프트웨어를 지목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초중고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을 의무화하고 더 나아가 입시에 연계시키겠다는 방침도 내놓았다. 소프트웨어가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기업과 정부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며, 사회의 투명성도 제고시킨다는 주장 등이 그 논리로 제시됐다. “자동차는 이제 가솔린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달린다”,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0대 기업 중 6개가 소프트웨어 기업”, “현재 180만개인 유럽 내 소프트웨어 일자리가 18년에는 480만개로 확대될 것”, “결국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등 화려한 말들도 이어졌다. 또,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 빌 게이츠 등 소프트웨어로 세상을 바꾸고 떼 부자가 된 사람들도 빠지지 않고 언급됐다. 하지만, 이렇듯 화려한 말들을 담은 내용들에서 정작 소프트웨어가 무엇이고,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소프트웨어가 단순히 기술의 영역을 넘어 전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됐다고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거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소프트웨어의 산업적, 기술적 성과만 부각될 뿐이다. 소프트웨어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강조하면서 소프트웨어가 갖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아닌 산업적, 기술적 의미만을 주로 설명하고 있다. 소프트웨어가 지배하는 소프트웨어 중심 사회에서 소프트웨어의 명령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는 다소 도전적 제목인 이 책의 저자 마노비치는 “오늘날 소프트웨어가 모든 곳에 침투해 있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것의 역사, 그리고 그 발전의 기저에 있는 이론 아이디어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거의 매일 사용하고 있는 “포토샵, 워드 등 미디어 도구의 기원이 어떠한지도 모르고, 이런 도구들이 왜 개발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의 컴퓨터화가 야기한 급속한 모든 변화들에 놀라 그 기원을 검토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소프트웨어가 지배하는 소프트웨어 중심 사회에서 소프트웨어의 명령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는 이유다. 소프트웨어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순간 기술적으로 탄생해 우리 앞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미디어들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대체되어오는 과정을 추적하고 논의한다. 단순히 소프트웨어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넘어 중요한 지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개념화해 제시한다. 혼종화, 진화, 심층적 리믹스는 소프트웨어가 전문적인 미디어 제작의 모든 영역에서 채택된 1990년대 이후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이 책이 모든 소프트웨어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운영체제 등과 같은 시스템 소프트웨어, 자동항법장치 등과 같은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대신, 일반적인 컴퓨터에서 어떤 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응용 소프트웨어로 범위를 좁힌다. 그 중에서도 우리 문화의 컴퓨터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소프트웨어, 즉 ‘문화 소프트웨어’가 주된 논의 대상이다. 마노비치는 이 문화 소프트웨어를 다시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미디어 콘텐츠의 창작과 편집을 위한 ‘미디어 소프트웨어’, 둘째, 미디어, 정보 및 지식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과 공유를 가능케 해 주는 ‘소셜 소프트웨어’, 셋째, 아이콘, 폴더, 사운드, 애니메이션, 상호작용 조작 장치 등 소프트웨어와 이용자들을 매개해주는 ‘미디어 인터페이스’ 등이다. 그 중 이 책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미디어 소프트웨어’다. 1960년에서 197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현재의 문화 소프트웨어 기저에 있는 개념과 실제 기술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동기, 소프트웨어로 인해 변화한 미디어 개념, 소프트웨어로 인해 가능해진 새로운 미학과 언어 등에 대해 미디어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마노비치가 미디어 소프트웨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용자가 미디어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소프트웨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마노비치는 이 책을 통해 컴퓨터의 역사를 “소프트웨어화(softwarization)”로 규정한다. 소프트웨어화는 기존의 미디어 제작 기술(영화, 사진, 회화, 음악 등)이 소프트웨어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 운영의 기반이 되는 컴퓨터가 단순한 연산 장치에서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 등을 처리할 수 있는 ‘미디어 처리장치’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소프트웨어화의 결과로 컴퓨터는 모든 미디어 형태를 처리할 수 있는 ‘메타미디엄(metamedium)’이 된다. 이 같은 관점에서, 현재의 미디어들은 ‘메타미디엄’인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로 구현된 것들이다. 워드프로세서는 글쓰기와 문서 작성 소프트웨어이며, 포토샵은 그림 이미지 조작과 합성의 소프트웨어다. ‘시리(siri)’ 등과 같은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들은 말을 인식하고, 영상들도 소프트웨어를 통해 편집되고 있다.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소프트웨어로 구현한 것이다.
마노비치에 따르면, 메타미디엄인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 소프트웨어가 생산한 콘텐츠들은 ‘미디어 이동성’, ‘미디어 모듈성’, ‘심층적 재조합 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특성을 공유한다. 소프트웨어를 통해 표준화된 미디어 콘텐츠가 네트워크를 통해 자유롭게 이동하고, 소프트웨어가 댓글, ‘좋아요’ 등의 경우와 같이 콘텐츠를 부분 부분별로 모듈화시킴에 따라 이용자들이 각자 자신의 맥락에 맞게 모듈들, 즉 콘텐츠를 언제든 재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재조합’이다. 미디어 소프트웨어가 여러 실험을 통해 등장하고 발명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상업화되고 보편화되는 진화 과정을 통해 현재의 소프트웨어는 혼종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양한 유형의 미디어들이 소프트웨어로 전환되면서 공유하는 소프트웨어 환경 안에서는 콘텐츠들이 마치 ‘쌓기 블록’처럼 손쉽게 재조합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렇듯 재조합되는 콘텐츠들은 과거에는 분리되어 있던 미디어 기술들을 결합한 것들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들이다. 이는 “인류의 미디어, 기호현상, 커뮤니케이션 역사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위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과 분석이 필요하다. 마노비치가 “미디어 이론에서 소프트웨어 이론”으로 옮겨가야 하며, “더 이상 미디어는 없고 소프트웨어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유다.
이렇듯 이 책은 미디어로서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미학과 그 변화에 대해 사회 문화적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단순히 포괄적 역사를 서술하고 기술적 변천 과정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분석하고 나름의 개념을 제시해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도 제공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미학, 공학 등 여러 분야 전공자들이 융합적 관점에서 꼭 읽어볼만한 책인 동시에 근래 강조되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양서로도 충분하다. 의무화되는 소프트웨어 교육에 기술적 부분을 더 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도 포함되기를 바란다.
다만, 역자가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미디어 소프트웨어를 다루면서 미디어의 속성 중 시각성만을 다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최근 강조되고 있는 촉각성이나 청각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출판 전인 2008년 공개한 이 책의 초안에서는 ‘유투브’ 등을 중심으로 ‘소셜 소프트웨어’에 대한 분석도 상당 부분 이루어졌지만, 정식 출판 과정에서 그 부분이 빠진 점도 아쉽다고 할 수 있다. 또, 다양한 미디어 소프트웨어를 분석하고 있는 점은 장점이지만, 이와 동시에 어떤 특정 소프트웨어의 버전에 따른 진화 궤적을 함께 추적했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분석이 이루어졌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한 부분을 언급하고 싶다. 이 책은 대부분의 번역서들과는 다르게 원문의 단어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고 원문의 취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번역자의 엄밀함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