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체제론의 관점에서 본 기본소득론

1. 현재 진행형의 시간을 둘러싼 투쟁

윤석열 정부가 소위 ‘주 69시간 근로제’ 추진을 공식화한 것이 2023년의 일이었다. 연장 근로 상한을 집중하면 특정 주는 최대 80.5시간까지도 일할 수 있게 하자는 유연화 방안이었다. 시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 52시간 근로제’를 허물 수 없다는 노동계와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의 반발이 거셌다. 결국 추진되지 못했다.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대립 구도는 대개 ‘주 69시간 대 주 52시간’이었다. 법정 주당 근로 시간이 40시간이라는 사실은 자취를 감추고, 연장 근로 12시간이 마치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대립 구도였다. 2022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연간 근로 시간은 1,915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다섯 번째로 길었다. 한국보다 근로 시간이 긴 네 나라는 멕시코,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칠레 등 모두 중남미 국가였다. 한국인은 여전히 오래 일한다.

2025년 2월,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는 반도체특별법 입법과 관련,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고소득 연구 개발자들에게는 주52 시간제를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 규정을 두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조선업계와 건설업계 등에서도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귀결될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근로 시간, 나아가 시간 자체를 둘러싼 갈등, 투쟁이 여전히 우리 삶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2. <시간 불평등>과 기본소득론

영국 런던대학 동양·아프리카대학(SOAS)의 교수인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이 쓴 <시간 불평등>(창비, 2024, 원제 The Politics of Time)은 시간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접근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 일(work)과 노동(labor)의 구별, 둘째, 역사적 시간 체제에 대한 분석, 셋째, 가상의 미래로서 진보동맹 정부가 펼치는 근본적 개혁의 내용과 효과가 그것이다.

1) 일과 노동의 구별

일과 노동의 구별이 저자가 시간의 정치를 분석하는 기본 틀이 된다. 노동을 줄이고 일, 무엇보다 참된 여가(스콜레)의 비중을 높이는 데 시간 정치의 요체가 있다. 구별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올라간다. 그리스의 자유 시민에게 “노동은 가난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고통스럽고 힘든 활동을 의미했다.” 시민들은 노동은 노예에게 맡기고, 시민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활동인 ‘일’(ergon)을 했다. 여기에는 공동체의 유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재생산과 관련된 일, 친지들과 함께하는 시민적 우정과 관련된 일이 포함되었다. 일의 대척점에는 노동이 아니라 스콜레로서의 여가가 있었다. 공감과 동정의 가치를 배우는 공공 연극 공연 관람, 아고라에서 벌어지는 공적 행위 참여가 모두 스콜레였다. “시민의 제1 목적은 스콜레를 위한 시간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은 일의 가치가 잊혀지고 노동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다. 사회민주당, 공산당, 대부분의 맑스주의들까지도 ‘노동의 존엄성’을 찬양하고 모두가 일자리를 갖는 완전 고용을 목표로 제시해왔다. 일과 노동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난 중대한 오류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2) 역사적 시간체제 분석

저자에 따르면 시간체제는 농업적 시간체제, 산업적 시간체제, 제3의 시간체제로 변화해 왔다. 농업적 시간체제 속에서 시간은 날씨와 계절, 그리고 공유지 내 활동의 리듬에 의해 결정됐다. 공유지는 “가난한 사람의 보호막”이 되었고, 공유화를 위한 일과 의례의 시간이 별도로 마련됐다. 중세를 거치며 공유지가 엘리트에 의해 사유화되자 사회불안이 폭발했다.

19세기에 전면화된 산업적 시간체제는 독립적인 일과 공유화에 쓰던 시간을 대폭 축소했지만, 노동시간은 급격히 증가시켰다. 시계와 기계가 노동을 표준화, 규율화했고, 노동 및 노동력은 완전히 상품화됐다. 노동이야말로 가장 적절하고 바람직한 생계의 방식이라고 믿는 노동 주의가 좌파까지 장악했다. 보편적 기본서비스의 제공 등 이른바 복지국가에서 이뤄진 노동의 탈상품화는 허구적이었으며, 노동과 시민권 사이의 연계를 오히려 강화했다.

1970년대 이래 정보기술혁명에 따라 제3의 시간체제가 부상했다. 노동력 대부분은 서비스 일자리에 종사하며, 노동 시간은 매우 신축적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줄어들고, 불안정, 불안전 노동을 강요당하는 프레카리아트가 늘어난다. 이들은 여러 시민적 권리를 상실하며,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 이들의 노동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기는 어렵다. 노동과 노동을 위한 일이 고정된 작업장, 지정된 노동시간을 벗어나 삶 전반에 침투한다. 장기간의 인턴, 0시간 계약, 가변 시간 계약, 파트타임 임시직, 파견 노동, 가짜 자영 노동 등 수많은 유형의 유연 노동이 번성한다.

제3의 시간 시대의 가장 큰 결점은 좋은 시간에 대한 접근의 불평등이 격심해진다는 것이다. 엘리트와 급여 생활자는 자신의 시간을 상당히 통제할 수 있지만, 프레카리아트는 거의 불가능하다.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는 미래라는 시간을 전망할 수 없는 탓에 심리적 안정도 찾을 수 없다. 민주주의를 위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없으므로 정치적 조직화도 어렵다.

3) 시간의 해방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2020년대의 어느 날, 영국에서 진보동맹 정부가 등장하여 ‘시간의 해방’을 추진한다는 마지막 장의 상상이다. 정부는 그동안 무보수로 여겨지던 가사일, 돌봄노동 등의 가치를 측정하고, GDP를 대체하는 새로운 지표를 창안한다. 엘리트들이 막대한 지대를 수취해 왔던 공유부로부터 부담금을 걷어 공유지 자본 기금을 조성한다. 이 공유부로부터 사회 구성원 모두에 대한 배당, 즉 기본소득이 지급된다. 액수는 곤경에 처한 사람이 생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다.

기존 복지 시스템의 선별 과정에서 발생하는 낙인과 배제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노동이 아니라 교육과 자원 활동, 서로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된다. 정부는 자동화에 과감하게 투자함으로써 불쾌하고 따분한 노동의 시간을 줄이고, 가치 있는 일의 영역을 넓혀나간다. 미디어와 문화의 영역에서 공유지가 확장되고, 숙의 민주주의가 실행되는 스콜레의 시간이 부활한다. 이렇게 세상이 바뀐다.

3. 남은 문제들

노동 연계 복지(workfare)가 유발하는 낙인 효과, 복지국가를 잔여화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인식돼 왔다. 복지가 소득 보장을 통해 정치 사회적 권리와 참여의 토대를 제공하기보다는, 효율적인 사회 투자의 측면에서 이해되어 온 탓이다. 복지 수급자를 노동시장으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사회를 재통합한다는 아이디어는, 노동시장의 분절과 파편화 속에서 이제 상시적인 노동과 사회의 불안정으로 귀결되고 있다.

보편적 기본소득론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제안되어왔다. 기본소득론의 맥락에서 이 책이 갖는 특성은 해방적 시간체제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소득이라는 맥락에서 논의가 전개된다는 데 있다. 소득 보장이라는 측면에 국한된 기본소득의 효과에 대한 논쟁을 넘어, 장기 역사의 관점에서 일과 노동, 시간의 통제권 변화에 대한 문제로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다시 말하면 어떤 방법으로 소득이 보장될 때 우리의 시간이 가장 풍요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존 노동 연계 복지의 한계는 뚜렷하다. 고용되어 있을 때는 물론이지만, 일자리를 잃었을 때도 상시적인 대기와 구직활동으로 우리는 시간 통제권을 잃는다. 게다가 심화되는 프레카리아트화로 인해 이런 구분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책은 이런 뚜렷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점을 남긴다. 첫째, 생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본소득의 수준, 공유부의 범위 설정과 부담금의 정도, 기존 복지 급여와의 조정 같은 이슈는 하나하나가 모두 폭발적인 정치적 갈등을 유발하는 문제일 것이다. 진보동맹 정부는 어떻게 이런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떤 계급과 어떤 방식으로 연대할 것인가? 어떻게 반발을 무마할 것인가?

둘째, 현물 급여나 바우처가 아니라 개인이 자유 처분할 수 있는 현금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기존의 시장 불평등을 강화하지 않으려면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

셋째, 둘째와 연결된 의문이지만, 이런 주장은 결국 생산-노동의 문제를 우회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노동의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는 더 한 층의 자동화로, 즉 현대의 노예 격인 기계에 넘기는 것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육체에 체화된 암묵지의 문제를 포함하여 자동화가 그리 간단히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노동과 일의 구별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노동의 인간화라는 명제가 간단히 외면될 수 있을까? 나아가 이는 기업 소유의 방식까지 포함한 생산의 재조직이라는 문제와도 이어진다. 사기업과 생산 방식을 지금 이대로 둔 채 경제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한국에서 기본소득론이 제시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논의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이 책을 통해 논의의 시간대가 대폭 넓어졌고, 시간이라는 문제가 전면에 부상했다. 새로운 토론을 촉발하는 신선한 자극제로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저자 : 조형근

소셜랩 접경지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