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다양한 얼굴과 미래 경쟁력
“허위사실임을 소명하라고요? 이건 허위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나쁜 ‘비판’인데요? 공인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시는 겁니까? 명예훼손이란 말입니다.”
며칠 전 ‘공인’ A를 대리하는 B의 항변이다. 한 블로그 게시글이 문제였다. 권리침해 신고를 통해 임시조치가 가능하다고 알려주면서 “다만 정무직 공무원 등 공인인 경우, 자신의 공적 업무와 관련된 내용은 명백히 허위사실이 아닌 한 명예훼손 관련 임시조치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는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의 정책결정 내용을 설명하던 중이었다. 해당 게시글이 허위사실임을 함께 소명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에 B는 이처럼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공인에 대한 비판은 중범죄란 인식이 분명했다.
명예훼손은 어렵다.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은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되지만, 공인들이야말로 가장 예민하다. 반면 지난해 12월 미학자 진중권 씨는 ‘명예훼손’을 이유로 한 권리침해 신고에 따라 자신의 게시글을 임시조치한 Daum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포털은 권리침해 신고시 ‘삭제’나 ‘임시조치’를 지체없이 해야 하는 법적 의무를 다했을 뿐이지만, 결국 이용자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임시조치’된 글의 게시자 불만도 간단치 않다. 첨예하게 엇갈리는 권리침해 주장자와 게시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이 문제에 관심 갖는 이가 많은 탓일까. 인터넷은 다양한 얼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명예훼손 등 ‘역기능’을 둘러싼 논의가 우선적으로 이뤄졌다. 명예훼손을 포함해 허위사실 유포 등을 둘러싼 정책적 고민도 진지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해 추진한 10대 정책 과제 중 인터넷 분야의 유일한 과제는 ‘소통의 장, 인터넷의 신뢰성 제고’였다. 건전한 인터넷 문화를 위한 정책적 고민은 다양한 윤리교육 외에도 익명성에 의한 역기능 개선, ISP의 불법정보 관리책임 강화 등을 골자로 했다.
2010년에도 불법유해정보 유통을 막고 인포데믹스(정보전염병)를 차단하는 일이 방통위의 새해업무 구상에 포함되어 있다. 다만, 인터넷을 바라보는 정부 구상은 인포데믹스만 집중 우려하던 전년과 조금 달라 보인다. 방통위의 올해 정책 과제에는 무선인터넷 활성화를 통해 인터넷을 되살려보겠다는 청사진도 제시됐다. 미래인터넷을 IT분야 국가적 어젠다로 설정해 지원, 육성하는 고민도 담겨 있다.
인터넷의 ‘역기능’뿐 아니라 ‘순기능’을 활성화하는 일에 정부가 적극 나서는 것은 상징적이다. 인터넷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고민이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드는 흐름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한동안 명예훼손이나 인포데믹스 같은 인터넷 역기능만 걱정하던 우리 사회가 인터넷 본연의 기회와 가능성, 미래에 눈을 돌리는 모습이다. IT강국이라는 오래된 기억에 안주하다가 인터넷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듯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예컨대 최근 ‘아이폰 열풍’은 모바일 인터넷 세상이 상상 그 이상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용자들이 만들고 있다. 이용자들이 인터넷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것을 늦출 수는 없지 않겠나.
B와 명예훼손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눈 그날, 마침 회사 워크숍이 진행됐다. 한 해 회사의 전략을 공유하는 자리에서 다양한 서비스 구상들이 소개됐다. 그저 인터넷 이용자 1인으로서 설레는 아이디어들이 적지 않았다. 온통 인터넷의 재기발랄한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인터넷 역기능 문제를 고민해야 하다니!
다행히 이런 어려운 과제에 대해 고민을 나누며 자율규제의 방향을 연구하는 분들이 옆에 있다. 함께 살신성인의 자세로 명예훼손처럼 어렵고 중요한 이슈를 풀어가야 할 모양이다. 그들 덕분에 자율규제의 토대가 탄탄해진다면, 다른 분들이 마음 놓고 인터넷의 미래 경쟁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