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포털의 투명성과 이용자 신뢰 – 가짜 뉴스를 중심으로

병인양요로 어지럽던 구한말, 사대부 대감의 걱정은 성리학을 지켜내고 외세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초연결 시대, 우리에게 위정척사사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100년 전, 성리학이라는 형이상학을 버리고 신문물을 받아 들였다면 어땠을까. 포털을 통한 표현의 자유와 투명성 그리고 신뢰 회복에는 성리학 못지않은 단단한 사회 체제가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문물의 특징을 간파하고 시대의 나침판을 세워야할 때에 19세기적 사고를 유물처럼 꼭 껴안은 법학자, 행정학자, 관료는 없는지. 아니, 19세기 그물로 포획된 21세기 기술은 미래에도 존재할까.

‘인터넷 포털의 투명성과 이용자 신뢰’라는 거대주제를 받은 필자로서는 담론이 주는 무게감에 먹먹해 올 뿐, 뾰족한 대안과 정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와이에서 택시 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는 필자에게 포털은 손님을 기다리는 지난한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소일거리다.

본인은 포털에 배치된 뉴스로 사안의 경중을 가늠해보고, 실시간 인기 검색어는 공중의 관심을 보여준다고 지레짐작한다. 이 소박한 짐작은 포털이 가짜뉴스, 가짜 인기 검색어, 댓글 조작, 편향적 이념의 통로가 된다는 의심을 불러왔다. 이는 소박한 의심일 뿐,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우리나라 몇몇 포털은 뉴스,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등을 한 몸통에서 서비스 하면서 정보가 여기저기로 흩어져 정화되어 돌아오는 것 같지만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이기적 개인의 활동에 공중의 이익이 손상 받지 않는 최적의 알고리즘 개발에 굼뜬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개선된 알고리즘에 의한 경쟁이 아니라, 콘텐츠의 포획과 집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숲을 조망한다면, 정보는 쉽게 잘 이해(소통: good understanding)되도록 선순환 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빠’에서 ‘○부대’에 이르기까지 포털에 대한 의혹과 불편한 심기는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포털은 뉴스 즉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고 담는 그릇인데 ‘그릇에 물이 고여 이끼가 끼고 더러는 상한 것 같다’는 주장이 있다. 콘텐츠는 인터넷 상수원인데, 국가가 나서서 표백제라도 뿌려 수질을 정화하겠다는 규제는 과연 바람직할까. 물을 담는 그릇인 포털이 동그란 그릇에 담으면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처럼 투명해 보인다. 뾰족하고 긴 주둥이에 담으면 속을 알 수 없어, 향기로 내용을 가늠하고자 코를 실룩 거릴 수도 있다. 포털이 좌와 우로 편향된 우리 정치사에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는 의혹이 가짜뉴스 논쟁으로까지 치달았지만, 지금까지 규제가 부족하여 2000년대 댓글부터 2010년대 가짜 뉴스까지 이어진 것일까.

규제주의자가 기술이 내포한 선한 가치와 오용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사회적 합의를 규율로서 정립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규제주의자는 표층적인 현상인 악플, 실시간급상승검색어에 대한 의혹, 댓글 조작 사건 등에 놀란 ‘권력자의 언사에 눌려, 사고 면피용 정책을 쏟아내기에 급급했다.’ 기업도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국회로 불려나가 진상을 설명하거나 급조된 세무조사 등을 받아야 했다. 어느 것 하나 바람직하다 볼 것이 없는데, 대한민국에 다음 한메일이 시작되고 네이버 검색엔진이 자리매김한 이후, 매년 겪는 수해처럼 반복되는 디지털 재앙이다.

 

비단, 이런 신뢰에 기초한 문제는 ICT 강국인 미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바마 전대통령이 처음 대통령 후보로 나온 2008년 캠페인 동안에는 ‘아랍의 첩자’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작년 미국 대통령 선거 역시 ‘가짜 뉴스’로 홍역을 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정보 간의 상호작용이 늘어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유유상종 또는 초기 알고리즘 안에서 역기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 45번째 미국 대통령 선거는 페이스북의 가짜뉴스로 공방이 있었다. 급기야 페이스북은 가짜뉴스를 선별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알고리즘이 잘 작동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가짜 뉴스를 선별한다고 해서 페이스북이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더러 가짜나 황색저널리즘 또는 자극적이고 낚시성 광고나 글로 쏠쏠한 재미를 보는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가짜 뉴스가 등장하고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 서비스가 갖는 자정 효과나 초기 개발당시의 검색 알고리즘이 그 기능을 잃어간다는 반증이다. 페이스북은 우리나라의 싸이월드와 유사한 관계지향형 서비스이다. 싸이월드는 1촌이라는 관계로 지인의 소식(뉴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검색방식을 사용했다면 페이스북은 공유, 외부 유입, 댓글 등 상호작용한 지인의 뉴스를 선별해서 보여주는 알고리즘을 사용하였다.

서구라 할지라도 명함을 주고받으며 직책과 직급, 지연과 학연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 식상하고 고루해질 때, 우리는 진짜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페이스북은 그 문화적 토대에서 관계란 와서 많이 보고 공감하고 반응한 이들이 ‘진짜 관계’라는 새로운 가치를 알고리즘으로 구현한 것이다.

페이스북의 성공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린 관계에 목말라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관계 맺기와 확장 방식이 수년이 흐르면서 그 고유의 패턴이 형성되고 결국은 경로의존적인 형태의 소통 방식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래서 페이스북 역시 유유상종이고 페북질을 할 ‘잉여의 인간’에게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 표피적 사건이 가짜 뉴스였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겉만 보고 규제를 한다면 인터넷은 발전할 수 있을까.

 

인터넷의 신뢰가 전체 생태계를 위협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미국내 자정은 규제에 있지 않고 발칙하고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도록 하는 생태계 유지에 있었다. 미국의 사례는 우리나라 포털의 자정작용과 신뢰 회복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필자는 페이스북이 우일신하지 못한다면, 남다른 관계 맺기 예를 들어 사물의 기억과 관계를 맺어 나가는 IoT 매개 소셜 네트워크라든지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상호 한계를 보완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포털은 대한민국 고유의 자생종들이 만발하면서 그 화려함을 뽐낼 수 없는 생태 환경이다. 30년 전부터 인공지능이 출현해 10년 전부터는 상당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었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페이스북이 나오면 포털의 유사한 서비스가 나오고 트위터가 나오면 역시 포털에서 유사한 서비스를 개발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모바일 포털에서 우버와 유사한 서비스를 내놓았는데 ‘과연 우버, 에어비앤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 초기 등장이 이미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은 포털 이었나’라는 점이다.

물론 네이버의 라인 등 몇몇 서비스가 선전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표 선수 겪인 포털 몇몇이 유리한 고지에서 신규 인터넷 서비스를 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가 있다. 바로 새로운 서비스 즉 메신저든, 지도든, 뉴스든, 블로그든, 메일이든 자사의 기존 서비스와 결합하여 신규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규서비스로 유입되거나 나가는 정보는 경쟁 서비스와 배타적으로 닫힌 구조여야 했다. 포털은 새로운 서비스를 런칭할수록 더욱 크고 넓은 닫힌 구조들의 결합구조를 이루면서 오염되기 쉬운 구조가 된다. 이는 필연적인 현상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 정책은 규제가 아니라, 정보 선순환을 위해 포털의 담을 허무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정책 입안자나 관료가 이상의 문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댓글 사건, 가짜뉴스, 실급검 어뷰스 사건 등이 나타날 때마다 규제로 포털을 옭아맸다. 무지가 부른 악화이다.

인터넷의 투명성이 저해된 이유는 무지한 정부 관료들의 묵인보다는 포털의 실시간 검색, 뉴스 배치와 순위 등의 자동화 알고리즘에서 어느 정도 국가 정책의 향방에 거스르기 싫은 몸짓이 익숙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무지한 관료는 언제든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정책을 권력자의 입맛에 맞추어 제시하기 때문이다. 포털도 내상이 큰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에 가짜뉴스 판별 알고리즘과 관련한 아이디어가 번득 떠올라 선잠자듯 만든 적이 있다. 그 판별이란 갑작스럽게 조회수가 올라간다거나 올라간 조회수라고 할지라도 특정인에 의한 수천번의 클릭인지, 수천명에 의한 단 한번의 클릭인지 또는 비중이 비슷하거나 성향이 유사한 언론사 간에 주고받는 기사 유사율이 높은 빈도인지, 특정인이 특정 장소에서 공유와 퍼나름을 즐겨하였는지, 제3파티 즉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 많은지 적은지 등을 보고 마지막에는 이용자가 ‘가짜/진짜’의 5점 척도를 주는 방식 등을 더해 뉴스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과연 이와 같은 작용이 이루어지면 가짜 뉴스가 판별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포털의 투명성을 두고 의구심을 품는 고질병은 면역력을 높이고 체력을 기르라는 원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단순히 표피적인 규제를 하나 더 늘려 관료들의 일감을 늘려주기보다, ‘인터넷 신뢰’라는 이 가치 지향적이고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담론을 새로운 알고리즘으로 구현해낼 젊은이가 튀어 오를 수 있는 스프링을 발받침대로 넣어주는 것이다.

가짜 뉴스, 댓글부대, 낚시성 콘텐츠 등 신뢰를 잃게 하는 사건 속에는 덕지덕지하게 덧입은 규제 정책만이 남아있다.

이처럼 어지럽게 덧붙이고 겹쳐진 ICT 정책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포털은 증강현실, 인공지능, 자율주행, 드론 등 다양한 정보재를 활용한 신선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내 놓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들의 아이디어로 다양한 콘텐츠가 이리저리 충돌하며 유성처럼 선회할 때 ‘인터넷 신뢰’에 대한 염려는 감기 증상으로 끝날 수 있다.

저자 : 강장묵

고려대학교 정보대학 교수 (* E-mail. honukang@gmail.com, kangjm@korea.ac.kr), 공학박사(2005)와 정치학박사(2009)를 받고 세계일주(2013-2014)와 하와이 택시기사(2017) 등 다양한 현장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기술을 삶의 소소한 일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때 행복해진다. 사회 참여로 국가인권위 정보인권 위원(2015-2016), 미디어 다음 열림이용자위원(2009-2010), 경실련 소비자주권 위원 (2016-2017) 등을 하였으며 SCI급 저널 다수와 특허 출원/등록이 100여건에 달하는 발명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