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U 규칙 개정과 인터넷 규제 논란
*1. 들어가며
1988년 이후 24년 만에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국제통신규칙(ITRs)이 개정됐다. 2012년 12월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린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WCIT-12)에서 193개 회원국 가운데 89개국이 ITRs 개정안에 찬성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55개국은 서명을 거부했다.1)
이번 회의는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러시아, 중국 등을 중심으로 ITU도 인터넷 통제권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에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비롯해 세네갈, 베네수엘라, 자메이카 등 제3세계 여러 국가들도 힘을 보탰다. 반면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은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한 때 찬성 쪽으로 기우는 듯 했던 스페인과 핀란드도 막판에 반대 진영에 가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새 ITRs에 찬성하면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 중국 같은 대표적인 인터넷 통제국들과 보조를 나란히 했다는 것이 비판론의 골자다. 이 글에선 ITU가 새롭게 마련한 ITRs의 주요 내용을 살펴본 뒤 한국이 찬성표를 던진 것이 과연 타당했는지 여부에 대해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
2. ITU 규칙 개정안 주요 내용2)
그 동안 주요 인터넷 관련 정책은 주로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가 관장해 왔다. ICANN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8년 출범하면서 그 때까지 미국 상무부가 행사해왔던 인터넷 정책 관련 각종 권한을 갖고 왔다. 그 동안 최상위 도메인 신규 도입 같은 중요한 정책은 직능별 대표들이 참여하는 ICANN 회의에서 결정해 왔다. 현재 ICANN은 직능별 대표제를 도입하고 있으며, 형식상으론 순수 민간기구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ICANN은 미국 상무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출범 당시 미국 상무부 산하 기관이었다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데다, 각종 정책 결정에서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특히 러시아를 비롯한 비영어권 국가들은 그 동안 ICANN이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인 정책을 펼친다는 불만을 강하게 제기해 왔다.
이런 불만이 조직적으로 제기된 것이 2012년 12월 열린 WCIT-12 회의였다. 러시아, 중국 등을 중심으로 회의 시작 전부터 ITU에도 인터넷 관장 권한을 주고 각국 정부가 검열과 감시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된 것이다. 각종 인터넷 정책이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던 많은 제3세계 국가들도 이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반면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인터넷 감시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 등은 ITU는 통신 쪽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고 맞섰다. 국가별 대표 체제로 운영되는 ITU가 인터넷 정책에 관여할 경우 ‘자유로운 공론장’이 감시의 공간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반대논리였다.
이들은 두바이 회의 기간 내내 날선 공방을 벌였다. 한 때 러시아 등의 주장대로 ITU 규칙에 인터넷 거버넌스 관련 내용이 포함될 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제기됐지만 결국은 인터넷 거버넌스 관련 조항은 새 ITR 본문에는 넣지 않는 쪽으로 결정됐다.
ITU는 총회가 끝난 직후 30쪽 분량의 ‘Final Acts’를 공개했다. 이 문건 1조 1항은 “통신 콘텐츠 관련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These Regulations do not address the content-based aspects of telecommunications)”고 규정하고 있다. 새로운 규칙이 ‘규제 시비’에 휘말릴 수 있는 콘텐츠 부문 대신 국제 네트워크(망) 문제에만 집중할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인터넷에 대한 내용은 Final Acts 24쪽에 처음 나온다. 인터넷이 좀 더 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To foster an enabling environment for the greater growth of the Internet)는 제목 하에 몇 가지 항목들이 나와 있다. 이 중 인터넷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섹션1’에 포함돼 있다. “세계 통신/ICT 정책 포럼, ‘디지털개발·브로드밴드위원회(BCDC)를 비롯한 ITU의 다양한 포럼 내에서 인터넷의 기술, 발전, 공공 정책 이슈를 다룰 때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관련 조항은 본 규정이 아니라 부가 세칙으로 돼 있다.
대신 새로운 규칙에선 국제 인터넷 로밍이나 스팸 문제 등을 위해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최근 빈발하고 있는 DDoS 문제 해결을 위해 트래픽 관리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림> ITU 규칙 개정안에 대한 투표 결과. 녹색으로 된 부분이 찬성국이다.
3. ITU 규칙 개정안을 둘러싼 공방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ITU가 이번에 통과시킨 규칙 개정안은 당초 걱정했던 것 보다는 상당히 약한 수준에서 정리됐다. 인터넷 규제 관련 조항은 본문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 따라서 겉보기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통신과 인터넷이 융합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명분은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선언적 의미를 담은 정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TU 총회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부터 강한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들의 비판 강도는 특히 심했다. 일부 언론들은 서방 국가가 주도하는 ‘자유로운 인터넷’과 러시아, 중국 등이 중심이 된 ‘통제된 인터넷’으로 양분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국내 언론들의 논조 역시 한국이 인터넷 통제국으로 전락했다는 쪽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논쟁을 좀 더 입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선 반대운동을 주도한 미국의 논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바이 현지에서 반대 운동을 주도한 테리 크라머 미국 대사는 IT 전문 사이트인 리드라이트와의 인터뷰에서 ITU의 규칙 개정 작업에 반대하는 이유를 밝혔다.3)
이 인터뷰에서 크라머 대사는 용어 문제를 비롯해 하마두 뚜레 ITU 의장의 약속 위반 같은 부분에 대해 문제 제기했다. ITU가 인터넷 거버넌스를 갖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미국 주장에서 생각해 볼 부분은 스팸과 네트워크 보안에 대한 시각이다. 미국은 새 ITR 5조에서 스팸 방지와 네트워크 보안을 위해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다고 명문화한 것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팸도 넓게 보면 콘텐츠의 일종이기 때문에 스팸 규제를 허용하게 되면 언론 자유 침해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논리다. 네트워크 보안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DDoS 대처 권한을 확대하게 되면 반대 여론 통제 수단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ITU의 이번 규칙 개정을 놓고 외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양론이 엇갈린다. 물론 미국 쪽에선 당연히 반대 여론이 더 많다. 실제로 미국 IT 전문 매체인 아스테크니카(Ars Technica)가 ITU 총회 직후 여러 전문가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살펴보면 ‘반대’ 쪽이 절대적으로 많다.4)
TCP/IP 프로토콜을 만들면서 ‘인터넷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빈트 서프 구글 부사장, 소비자단체인 민주주의와 기술센터(CDT)의 엘러리 비들 정책 애널리스트, 조지 메이슨대학 머카터스센터의 제리 브리토 수석 연구원 등은 새 ITR에 담긴 용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것들이 인터넷 통제의 빌미를 만들어줬다고 비판했다. 특히 제리 브리토 연구원은 이번에 통과된 규칙이 트로이 목마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엔 인터넷 규제 관련 조항이 본문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러시아, 중국 등 규칙 개정 주도국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선 언제든 본문에도 관련 조항이 들어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개정 ITR에 ‘인터넷’이란 단어 자체가 들어가는 것조차 거부한 것은 잘못된 처사였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미국 시라큐스대학의 밀턴 뮐러 교수다. 뮐러 교수는 아스테크니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이번 회의에서 극단적인 반대 여론을 주도하면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4. ITU 규칙 개정과 인터넷 주도권 다툼
미국은 ITU 규칙 개정에 왜 그토록 강하게 반대했을까? 물론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웠던 ‘인터넷 자유 침해’에 대한 우려가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언적인 주장에 지나치게 기대게 되면 반대 운동을 주도한 미국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ITR 개정을 둘러싼 공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인터넷 거버넌스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현재 인터넷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나 인터넷 거버넌스포럼(IGF) 같은 단체는 직능별 대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인터넷 기반이 넓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발언권이 클 수밖에 없다. 반면 국제연합(UN) 산하 기구인 ITU는 한 국가당 한 표씩 행사하는 구조다.
ITU가 주요 인터넷 정책에 대한 결정권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직능별 대표제 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입김이 현저하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이번 회의 내내 ITU 규칙에 인터넷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측은 일관되게 인터넷 정책은 다자간 협력 모델을 통해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인터넷 정책은 국가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것보다는 시민, 직능 단체들이 중심이 된 다자간 협력 모델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순리에 맞는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ITU 규칙 자체에 인터넷이란 말 자체가 아예 언급도 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통신과 인터넷이 한 몸이 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988년에 규정한 산업 기준에 따라 ITU의 활동 영역을 제한하라는 것은 사실상 제대로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ITU 규칙에 인터넷 거버넌스 관련 조항을 삽입하려는 러시아나 중국의 속내 역시도 복잡해보이긴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단순히 인터넷을 규제하겠다는 의도 때문 만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중 상당수 나라들은 굳이 ITU를 통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을 규제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특히 중국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서비스도 수시로 차단해 왔다. 인터넷 자체를 막는 것은 쉽지 않지만 망 사업자나 검색, 포털 사업자 규제를 통해 반정부적인 콘텐츠들을 쉽게 차단했다. 따라서 러시아나 중국 등이 ITR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규제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의도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결국 서방국가들과 러시아, 중국 등이 ITU에서 팽팽한 힘겨루기를 한 것은 ‘인터넷 거버넌스’의 기본 철학 논쟁이라기보다는 주도권 다툼이라고 봐야 한다.
이번 논쟁에서 미국, 영국을 비롯한 영미권 국가들이 한 쪽 진영을 형성하고 러시아, 중국 등 비영어권 국가들이 반대쪽에서 단결된 모습을 보인 것도 그런 차원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보게 되면 영어권 국가이면서 대표적인 인터넷 규제 국가로 유명한 인도가 개정 규칙에 서명하지 않은 부분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미국 일부 외신들이 회의 직후 인터넷 분열 가능성을 경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 일부 언론들은 ITU 총회가 끝난 직후 서방 국가 주도의 ‘개방된 인터넷’과 러시아, 중국 중심의 ‘폐쇄된 인터넷’으로 양분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ITU가 인터넷 규제 쪽에 좀 더 힘을 갖게 될 경우 자유로운 인터넷 세상이란 대의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 : 한국의 찬성, 어떻게 봐야 할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ITU 규칙 개정은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인터넷 자유 수호’란 대의명분 뿐 아니라 인터넷 거버넌스를 둘러싼 각 국가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통제 국가들 편을 든 정신 나간 선택’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엔 ITU 규칙 개정을 둘러싼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너무도 복잡하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당연히 전략적 선택을 할 때도 이런 부분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ITU 규칙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전략적으로 제대로 된 선택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이 모든 것을 감안한 뒤 판단해야 한다.
방통위는 ITU 총회 직후 규칙 개정 찬성에 대한 비판에 쏟아지자 보도자료를 내고 “일부 언론이 언급하고 있는 국제기구 공조에 대한 내용은 포함돼 있지 않다”면서 “정보보호, 스팸, 네트워크 침해 등과 관련된 인터넷 이슈는 ITU, OECD, ICANN 등 모든 국제기구와 국제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해명됐다. 본문에 인터넷 규제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방통위의 설명이었다.
방통위가 찬성표를 던진 이면엔 이런 상황 판단 외에도 차기 전권회의 주최국이란 정치적인 상황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대놓고 반대를 할 경우 다음 회의 주재가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방통위가 인터넷 통제에 힘을 보탰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것도 이런 고민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많은 사안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 것이 과연 합당했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인터넷 통제국’이란 원초적인 비판을 쏟아 붓는 것이 어색한 것만큼이나 러시아나 중국 같은 나라들과 보조를 같이 한 부분이 자연스러워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캐나다 같은 서방국가처럼 대놓고 반대할 명분이 약했다면, 차라리 서명을 보류한 뒤 앞으로 진전되는 상황에 따라 입장을 정리하는 건 어땠을까?
잘 아는 얘기지만 외교의 기본은 ‘실리’와 ‘명분’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다. 인터넷 같은 거대 담론에선 특히 실리와 명분을 함께 챙기는 외교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번 ITU 규칙 개정에서 우리 정부가 보여준 행보는 ‘실리’에 충실했을지는 모르지만 ‘명분’이란 면에선 다소 약해 보인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을 것 같다.
<각주>
* 이 글을 작성하면서 필자가 썼던 <‘인터넷 거버넌스’와 ‘인터넷’ 거버넌스> ( http://opinion.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712368&g_menu=043101), <ITU 후폭풍…한국, 이젠 인터넷 규제국?> (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712155&g_menu=020310) 에 포함된 내용을 재구성하였다. [본문으로]
1) Signatories of the Final Acts. http://www.itu.int/osg/wcit-12/highlights/signatories.html [본문으로]
2) Final Acts. http://www.itu.int/en/wcit-12/Documents/final-acts-wcit-12.pdf [본문으로]
3) Popescu, A. (2012). 5 Reasons Why The U. S. Rejected the ITU Treaty. Available at http://readwrite.com/2012/12/14/5-reasons-why-the-us-rejected-the-itu-treaty#feed=/search?keyword=ITU%205%20reasons [본문으로]
4) Lee, T. B. (2012). Why the ITU is the wrong place to set Internet standards. Available at http://arstechnica.com/tech-policy/2012/12/why-the-itu-is-the-wrong-place-to-set-internet-standard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