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경로의존성’에 주는 일침

BTS가 한국어로 부른 노래로 빌보드를 누비고,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쥔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은 코로나19 방역조치에 효과적으로 대응해 해당 기간 GDP 위축이 가장 적은 국가이다. 어디 그뿐인가. 각국의 제조업이 휘청거린 시기에 때마침 중국의 물량 공세에 고전하던 한국의 조선업은 기술력 우위를 입증했고, 전기차 시대를 맞아 반도체의 가치는 우뚝 솟았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제호대로 정말 우리는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를 ‘헬조선’이라 칭하는 것은 특정인들의 지나치게 자조적인 모습일까? 2021년 한국은 하루 평균 38명이 자살하고 0.92명이라는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률을 기록하고 있으니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특히 높은 청년실업률과 천정부지로 치솟은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은 우리의 암울한 이면이다.

한겨레신문을 거쳐 엠파스 등 IT업계를 경험한 한빛미디어 의장인 저자는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바삐 오다 빼먹은 것들을 챙겨야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사실 요약이나 서평이 그다지 필요치 않을 만큼 이 책은 간결한 표현, 알기 쉬운 개념 정의를 통해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아가 처방전까지도 명료하게 제시한다. 아래에서는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가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선진국은 정의하는 사회이다. 백서(白書)보다는 녹서(錄書)를 준비하자.

독일의 <산업 4.0>은 4차 산업혁명을 맞아 산업계가 어떻게 바뀌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담은 백서이다. 이 책은 이 백서에 앞선 녹서를 주목하라고 한다.1 독일은 백서를 내놓기 2년 전 녹서를 통해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담긴 백서를 내놓으면서 미래사회에 대비하고 있었다. 토론과 합의를 생략하고 속도에 사활을 거는 우리로서는 ‘아니 인공지능 발전이 급속하다던데 어떻게 토론에 2년을 쓰나?’라고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일이 2년여 시간을 갖고 완성한 백서를 우리는 화들짝하고 놀라서 읽고 베낀 게 4년 전이다. 생각건대, 선진국이란 오히려 남들보다 앞서서 질문하고, 정의하는데 시간을 들더라도 충분히 자신 있는 사회가 아닐까?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후발추격국으로 ‘미친 속도’를 내서 선진국을 따라잡았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저자는 ‘원격진료’에 관한 공방에서, 원격진료에 대한 정의 없이 시작된 논의가 결국 ‘어떻게’로만 겉돌게 된 것을 예시로 꼬집는다. 단적으로 근래 인공지능 규범에 관한 논의가 인공지능과 그 활용이 무엇인지 관한 토론이 생략된 채 그것을 어떻게 안전하고 윤리적으로 운영할지에 대한 논의만 무성한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라도 돌이켜 생각해 볼 일이다.

둘째, 신뢰 자본 · 경로의존성 탈피· 명확한 상벌 체계가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커피숍에서 노트북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노트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저자는 이를 신뢰자본이라고 한다. 서울역에 검표원이 없이 열차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도 대표적인 신뢰자본의 예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뢰자본의 모범례가 서울역 앞에서 멈췄으니 제도와 운영으로 이어가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은 脫경로의존성을 말한다. 시대가 바뀌어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면서도 조선시대의 제도, 법률, 관습,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경로의존성으로 당장 내지 않게 된 비용은 미래에 눈덩이처럼 커진다. 영국에서 오른손잡이인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으로부터 행인을 보호하려고 왼쪽 통행을 하다가 자동차마저 우핸들로 정착하게 된 사례가 대표적인 경로의존성이다. 웃지 못할 것은 별 생각 없이 이를 채택한 일본도 덕분에 비싼 비용을 치루게 됐다는 점이다.2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의 경험에는 반면교사로 삼을 것도 많다. 소셜미디어시대에 속보와 특종을 외치는 신문사들의 경로의존성, 검경의 기소제도가 이제는 바꿔야 할 것들이다. 아울러 새로운 기술이나 플랫폼의 등장에 기존 규제의 틀을 이름만 바꿔 적용하려는 규제당국의 경로의존성도 돌아볼 일이다. 모든 경로의존성으로 인한 경로 독점은 무너지게 돼 있다. 지능정보화가 이끄는 다음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바뀐 물길을 찾아 떠나야겠다.

셋째, 중산층과 정치야말로 선진국을 지탱하는 지표이다.

이 책에서는 선진국의 정부가 할 일은 분명하다고 한다. 바로 중산층 비중을 늘리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적으로 봐도 허리인 중산층이 튼튼한 사회가 늘 가장 건강했다. 중산층이란 경제적 지표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건강, 문화, 교육 등 다양한 척도가 있을 수 있다. 언급했듯이 몇 가지 경제지표로만 보면 한국은 분명 선진국이다. 그러나 현실은 10대는 대학을 가기 위해 체력과 학습능력의 기본기를 갖출 시기에 수험에만 전념하고, 가까스로 대학의 문을 딛고 나온 2· 30대는 변변한 직장을 찾느라 전전긍긍이다. 저자는 중산층 비중을 늘리는 것을 정부의 최고 지표로 삼아도 좋다고까지 강조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일을 할 정치인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는 정치는 한 사회의 자원을 분배하는 시스템을 결정하고 마련하는 일임에도 한국사회는 유독 전문직으로서 정치가가 없다고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정치가로 입문하는 과정이 길다. 학생 때부터 당에 가입하고 지방의회에 출마해 의정 능력을 입증하면 그 다음 차원의 선거에 도전해 다시 능력이 입증되고, 지방자치 단체장에서 중앙정치로 호출이 된다. 그래서 30대에도 정치가로서의 충분한 경험과 실력을 쌓을 수 있다. ‘오래된 맛집만큼이나 뛰어난 정치인도 시간이 필요하다.’

넷째, 신뢰가능한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있다.

정보통신 분야의 전문가인 저자는 이 책의 상당분량을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의견으로 담아냈다. 특히 제3부는 국무총리 산하의 제4기 공공데이터 전략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던 과업과 저자의 의견이 포함돼 있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위험으로 거론되는 페이스북의 감정조작 실험과 케임브리지 애널리카 사례에서는 ‘조작된 감정’을 기술의 위험요소로 꼽는다. 그리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에 대응한 안전장치가 있는 변화수용체계를 만드는 것이 대안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인공지능의 위험에 대한 우려는 학계와 산업계에서 즉시하고 있는 주제들이다. 중요한 점은 인공지능의 편향과 불투명성에 대응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추가 입력 데이터의 적절성을 가려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데이터의 활용에 있어서 정부가 먼저 나서서 투명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바로 공공데이터의 공개와 활용이다. 특히 공개된 데이터 만큼은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데이터의 양식으로 공개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데이터는 새로운 석유이다. 디지털 뉴딜에서 데이터 활용에는 기계가 쉽게 판독가능한 데이터가 준비돼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가 비록 경제지표에 국한된다고 하더라도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근대사회만을 생각하면 한국사회는 2차대전 이후 신생독립국에 가깝다. 짧은 시기,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미친 속도’로 이만큼을 이룬 것이다. 저자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실천적 항목으로서 다양한 개념과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중 인상적인 한 가지를 꼽으라면,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정의는 이제껏 달려온 그 미친 속도만큼의 집중력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들을 공론장으로 들고 나와 정부와 기업, 시민 모두가 서로의 입장에서의 의견들을 들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단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55분은 문제를 정의하는 것에 사용하고 나머지 5분은 그 문제를 푸는 데 쓸 것이다.” – 아인슈타인 –

  1. 유럽연합에는 녹서라는 제도를 갖고 있다. 녹서란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사회 정체의 토론을 요청한 제안으로 독일 정부는 <노동 4.0>이라는 백서를 내놓기 2년 전 <노동 4.0>을 내놓고 사회 전체의 토론과 의견 개진을 요청했다. 토론에는 공기업, 협회, 기업, 학계 전문가, 일반 시민들이 참여했다. 박태웅, 「눈떠보니 선진국」, 한빛비즈(2021), 17-19면. [본문으로]
  2.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오른손으로 수동식 기어를 조작하기 때문에 편의상 핸들을 왼쪽에 둔다. 우핸들을 좌핸들로 바꾸려면 단순히 운전대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다. 파워트레인, 인터레어, 제조시 내수용과 수출용 차로 2 라인을 만들어야 하는 등 비용적인 소모가 대단하다. 박태웅, 이 책의 본문, 84-85면. [본문으로]
저자 : 이희옥

KISO저널 편집위원 / 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