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돌격 시대, 우리가 자유로운 소비자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
『A.I 시대, 본능의 미래』 (제니 클리먼 저)는 가히 현대 과학기술의 돌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법한 최첨단 기술적 구현물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원제는 Sex Robot, and Vegan meat이지만 저서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이 외에도 바이오백(체외수정이 가능한 인공자궁)과 죽음의 기계(질소에 의한 자살 조립장치) 등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놀라운 기술적 상품들을 통해 과거의 생물학적 문화적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극적이며 현실적인 차원에서 비춰준다.
지금까지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간주해왔던 삶의 마디마디에서 만나게 되는 경험들, 모체로부터의 탄생을 통해, 식물과 동물로부터 영양소를 얻고, 타인과 사랑을 하며, 유기체로서의 삶의 종말을 맞이한다는 이 장구한 휴머니즘적 서사가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한 유효함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가능성의 미래가 필자가 소개하는 다양한 기술적 구현물을 통해 매우 극단적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극단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기술들이 기존의 인간-인간의 대면 방식을 무너뜨리고 향후 인간-기계의 결합 방식을 통해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멀지 않은 미래에 대체 가능할 수도 잇다는 현실성 때문일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특정 기술의 미래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향에서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변화할 수 밖에 없고, 해당 기술이 사회에 개입하는 순간, 기술의 활용은 그 사회가 의도와는 무관하게, 때로는 기술의 내재적 특징과도 다른 방식에서 사회에 확산되기 마련이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인간의 대면 방식의 우월함을 주장하거나 인간-기계의 결합 방식의 위험성을 제기하는 이분법적 논의는 무의미하며 가능하지도 않은 현실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사회 내의 기술이 상용화되기에 앞서 과연 이 기술의 필요성이 무엇인지, 해당 기술의 도입을 통해 기존의 사회나 인간다움의 특성이 어떤 수준과 범위에서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지난한 소통과 합의, 공론화의 절차를 실천하려는 노력이다.
특히 과거 당연하게 여겨졌던 섹스와 탄생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이것이 지금까지 자연적이라고 간주돼왔던 기존의 방식을 대체함으로써 제기되는 쟁점들이 첨예하고 대립적일수록 기술이 합의되는 사회적 공간과 담론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하다. 그런 점에서 인간-기계의 결합인 섹스로봇의 존재와 부분적 체외발생 장치인 바이오백의 등장이 예고하는 대립의 심각성은 공장식 사육이 아닌 실험실에서 고기를 생산한다는 ‘배양육’의 발명이나 스스로 자살 장치를 조립해 자기종말의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는 ‘죽음의 기계’의 논쟁을 앞선 두 주제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로 보이게 할 정도이다.
먼저 섹스 로봇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국내에서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의 관점에서 리얼돌 논의가 쟁점화돼 있지만 현재 최첨단 수준의 리얼돌 공장의 미래는 단순히 실리콘 촉감의 인형 수준을 넘어서 인공지능을 장착하고 딥러닝을 통해 자기학습이 가능한, 말 그대로 섹스 기능을 탑재한 섹스 로봇에 달려있다. 섹스 로봇의 찬성자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섹스 로봇의 존재가 인간 파트너를 가질 정서적, 신체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들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섹스 로봇의 존재가 타인에게 성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 상황(강간, 학대)을 약화시켜 줄 수 있는 대체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섹스 로봇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신체의 모든 부분이 주문자들의 요구에 따른 맞춤형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점에서 이는 딥페이크에 의한 연성 포르노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섹스 로봇이 사회적 성적 학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체물로 기능할 것이라는 찬성론자들의 발상 자체가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아닌 상쇄에 불과한 비겁한 접근이라고 강력히 비난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섹스 로봇에 대해 반대론자들이 가지는 근본적인 거부의 지점이 찬성론자들에게는 섹스 로봇의 강점으로 여겨지는 것이기에 더욱 첨예한 대립을 야기하게 된다. 즉 찬성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 로봇의 매력은 감정을 가진 척할 뿐, 결코 감정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소유물이기에 소비자에게 어필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함께 건립하는데 꼭 필요한 공동존재자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공감, 연대에 기반한 소통능력을 약화시킬 뿐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로봇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는 21세기 현실에서 이는 로봇의 권리 차원에서도 부정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점도 반대론자들의 논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태아의 체외생존장치로 고안된 바이오백에 대해 알아보자. 시험관 아기의 탄생이나 대리모 산업이라고 불리는 체외수정에 대한 기술적, 문화적 개입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모체와 태반으로부터 분리된 소위 ‘인공 자궁 장치’ 기능을 가진 바이오백의 등장은 단순히 생식의 조력 장치를 넘어 체외 발생에 대한 논제를 남긴다. 물론 바이오백은 완전한 체외 발생 장치는 아니며 조산의 위험한 상태의 산모로부터 태아를 분리, 바이오백 안에서 영양을 공급함으로써 태아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부분적 체외생존장치이다.
아기의 모습을 초음파 이미지로 흐릿하게 보여주던 과거의 기술로부터 진일보한 바이오백의 가시적인 성과에서 우리는 투명한 시선의 권력을 가진 과학기술의 자기도취를 엿볼 수 있다. 아직은 부분적 채외생존장치에 불과하지만 향후 완전한 체외발생장치로서의 발전은 기술의 문제가 아닌 법과 윤리에 달려있다는 것이 해당 영역의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체외발생장치가 상용화된다면 어떤 쟁점들이 등장하게 될까? 해당 기술은 임신이라는 여성 신체의 특수한 경험을 외부화한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여성주의적 쟁점들이 주를 이루지만 쟁점 내부로 들어가면 의외로 근본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합의하기 어려운 입장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찬성론자들은 완벽한 체외발생기가 등장하게 되면 비로소 여성을 생식이라는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고 이는 임신으로 인한 경력의 단절은 물론 이후 남게 되는 상당한 수준의 신체의 상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 평등의 기본적인 전제가 시작되는 획기적 사건이라고 보았다. 이 외에도 동성으로 가정을 이뤘거나 자궁이 부재한 여성 중 임신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체외발생장치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주장들이 개진됐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자궁을 소유하고 생식하는 여성의 태생적 취약함이 문화적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사유실험에서나 가능한 완벽한 젠더의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이 장치로 인해 생식과 출산의 경험이 함축하는 창조적인 힘과 여성의 특권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실이 변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해당 장치가 여성의 자유를 가져오리라고 보는 찬성론자들의 낙관론적 입장이 지나치게 순진한 접근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섹스로봇과 바이오백의 존재는 인간적 경험의 결정적 순간이라고 간주되는 삶의 마디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서로 다른 입장과 쟁점을 동시적으로 발생시킨다. 누군가에게는 특정한 기술적 개입이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게 할 것이라고 유혹하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이 기술이 암흑의 미래를 앞당기는 으스스한 현실이라는 경고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기술의 적용이 다수가 쉽사리 합의하기 어려운 입장의 격차와 다양한 수준의 쟁점들을 발생시킨다면 그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우리는 루만(Luhmann)이 정의하는 현대 사회의 기술의 특징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루만은 현대 사회의 기술은 더이상 앎을 위한 앎으로서의 과학을 스스로의 모태로 삼지 않으며 오직 철저하게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기술은 ‘인과성을 매개로 한 기능적 단순화(a functioning simplification)”1이기에 오직 기술은 기능의 단순화라는 특정 목적을 수행하도록 설계되고 목적되고 수행되는 특화된 장치이다. 그리고 이 기술의 현실 가능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오직 시장과 경제 체계가 유일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최첨단의 현대 기술이 가지는 기능적 단순화는 곧 본능이라고 간주되는 원초적 이익을 위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술이다. 안락함, 편이, 자유, 쾌락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할 사람들을 위한 시장이 있다면, 기술은 시장이 원하는 대상을 현실화시키는 방식에서 제작, 유통,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의 활용은 기술의 내재적 목적 이외의 보다 나은 다른 목적들을 위해 쓰일 수도 있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확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루만이 지적했듯이 현재 사회의 기술은 늘 시장과 경제 체계를 전제로 한 기능적 단순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필자인 제니 클리먼은 어두침침한 서재 한구석에서 수북이 모아놓은 자료를 분석하며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다. 전 세계를 누비며 비상한 사건과 사람들을 취재하고 발굴하는 기자이며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그녀의 글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이유는 이러한 극단적 기술들이 가진 시장의 현실 가능성 때문이었다. 대륙 간의 첨예한 경쟁으로 더욱 가속화된 기술의 발전은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스타트업 기업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연계하며 글로벌한 수준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때로는 과장되기도 하고 허접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기능의 단순화라는 기술의 구현물이 고객의 맞춤화된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이면서 해당 기술의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지고 성장의 잠재성은 더욱 가시화됐기 때문이다. 필자가 소개하고 있는 기술의 미래는 단순히 상상가능한 수준이 아닌 현실의 또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의 인간적 서사들을 상당 수준에서 바꿔놓을 것이라는 주장이 독자들에게 으스스한 놀라움을 안겨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 Foucault)는 신체의 다른 힘보다 과도하기 쉬운 성적 행위와 욕망을 포함한 아프로디지아(aphrodisia)의 개념을 통해 이 힘에 대한 절제와 훈련을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의 지표로 삼았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삶의 방식을 ’실존의 미학‘의 한 예를 제시했다.
이러한 이상적 수준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면적으로 통제 가능한 소유물을 성생활의 대상으로만 한정하는 기술의 부작용이 무엇인지, 모체로부터 분리된 투명한 시선의 권력이 태아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는 기술의 미래가 향후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
소비자로서 개인의 자유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기술의 활용은 인간다움의 특징인 공감과 연대를 취약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크다. 기후 변화로 인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회의 양극화가 역사상 최고 격차를 기록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선 세계적 수준의 시민성이며 이것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생존적 요청이 됐다. 기술이 돌격하는 시대, 이제 자유로운 소비자를 넘어 인식하고 행동하는 세계시민의 길을 고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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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las Luhmann, Risk: A Sociological Theory, New York: Routledge, 2017, p.8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