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온라인 극단주의(Online Extremism)

‘김군’의 IS 합류는 인터넷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거나 지금보다는 훨씬 어려웠을지 모른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온라인 공간은 진보적 낙관이 넘실대고 있었다. 지금도 온라인 공간은 오프라인보다 자유롭고 진보적이지만, 과거에 비하면 확연히 ‘누아르적(noirish)’인 공간이 되었다. 거의 모든 영역이 자본에 점령당했다. SNS는 거기에 더해 편집증적 음모론과 히스테리적 자기전시가 난무하는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극단주의와 극우주의의 창궐은 온라인의 누아르화를 완성시키는 화룡점정이라 할만하다. 한국사회의 온라인 공간으로 좁혀 보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극단주의는 주로 IS 같은 종교적 근본주의보다는 정치적 극우주의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심지어 개신교 넷우익들조차 그렇다. 물론 그 모든 정치적 극단은 결국 반정치(anti-politics)로 귀결되지만 말이다.

 

분화하는 우파

2003년 3월 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 소위 ‘애국보수세력’이 모였다. “해방 이후 최대의 우익 집회”라 불린 이날은 ‘반핵 반김(정일),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였다. 초대형 스피커에서는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였다. 군중은 한 손에 태극기 다른 손에 성조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 미국 만세, 유엔 만세!”를 외쳤다. 천주교한민족돕기회 회장 봉두완 씨가 단상에 섰다. 그는 엄청난 인파에 고무된 듯 격앙된 목소리로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총재를 소개한다. “여러분, 이철승 씨는 비록 전라도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입니다!”

이때가 한국 우파에게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출범과 함께 우파들은 이전 정권-그 정권 역시 개혁성향 정권이었음에도-과도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온갖 종류의 사안에서 격렬한 증오를 드러냈다. 우파의 의사표현이 투표만이 아니라 직접행동으로 표출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 우익’과 ‘직접행동’은 사실 어색한 조합이다. 우파에 대한 그간의 이미지는 대충 이러했다. ‘평소엔 정치적 토론을 선호하지 않지만 막상 투표소에선 거의 맹목적으로 극우보수 정치세력에게 표를 몰아주는 고령자.’ 이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적 토론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권도, 시스템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세팅되어 있는데 뭐하러 토론 같은 걸 하겠는가. 그냥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두 번 연속으로 개혁정권 시대를 맞고 보니 ‘이대로는 정말 큰일나겠다’는 위기감이 전례 없는 강도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정권의 탄생과정상 극우보수 세력에게 나름 타협적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그랬던 김대중 정권과 달리 노무현 정권은 당시 월간 <말>이 표현한 것처럼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는 대통령”이었다. 당내경선 승리도 힘들었던 후보 노무현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만든 건 자발적으로 모여 헌신한 시민들이었다. 노 정권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우파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지게 되지만(예컨대 사학법), 이미 정권출범 극초반에 우파들은 극도의 공포를 안고 있었다. ‘온라인 여론전에서 완벽히 밀렸다’는 반성 역시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그들은 이제 변해야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행동하는 우파는 동시에 ‘산개’하고 ‘분화’하는 우파이었다. 내부 헤게모니 투쟁도 격화되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 속하는, 그리고 주류에 진입할 기회를 노리던 극우보수세력들은 온라인에서 매체를 만들어 본격적인 담론투쟁에 나섰다. 신혜식 씨가 만든 <독립신문>이 대표적이었다. 이 매체는 ‘임동원 간첩설’에서부터 ‘촛불시위 최초 제안자가 알고 보니 <오마이뉴스> 기자였다’는 ‘폭로(?)’에 이르기까지 우파 내부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낼만한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참고로 덧붙여두자면 2002년 촛불시위를 제안한 아이디 ‘앙마’(김기보 씨)는 오마이뉴스 상근 기자가 아니라 시민기자로 기사투고를 한 것이었다. 온라인 극우세력 내에서 활발히 통용되는 ‘애국세력/매국세력’ 같은 어휘들을 온라인에 정착시킨 것도 당시 신혜식과 같은 “청년보수”들이었다.

현실권력을 지향하는 “청년보수”의 흐름은 이후 지금까지 쭉 이어져오고 있다. 반면 이와는 좀 결이 다른 온라인 우파(“넷우익”)들이 존재한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급격히 덩치가 커진 다문화 반대 커뮤니티들과 2013년 이후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온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최근 급격히 세를 키우고 있는 개신교 넷우익 등이 그들이다.

온라인극단주의

 

반다문화 담론의 창궐

반다문화 담론은 2000년대 중후반 인터넷에서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그중 가장 많은 회원들이 활동하던 커뮤니티 중 하나가 ‘다문화정책반대’ 카페다(2015년 현재 거의 활력을 잃었는데 아마도 이는 일베의 부상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커뮤니티 담론분석을 시도한 2010년 무렵에는 제법 많은 글들이 올라오던 시기였다. 2012년 출간된 책 <우파의 불만>에서 나는 이들을 학계의 뉴 라이트 담론과 구별되는 기층우파 담론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이들 반다문화 담론 중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인 것은 경제담론이었다. 쉽게 말해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주장이다. 그 다음으로 많았던 게 경제담론과 민족담론을 결합한 ‘국익주의 담론’이다. 국익주의 담론은 온전히 민족주의에 포섭되지도, 또 완벽히 시장규율에 복종하지도 않으려는 담론주체가 편의적으로 공적 담론에 대응하기 위해 상상적으로 구성한 정당화 전략이다. 또한 “국익”에 대한 강박적 집착은 시장주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결탁하는지를 보여주는 담론형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다. 이런 담론 외에 ‘이주노동자들이 에이즈를 퍼뜨리며 범죄를 양산한다’는 식의 보건·치안담론도 자주 등장한다. “극우파” 또는 “인종주의”라는 비난에 반다문화 담론주체들은 꽤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노골적인 인종차별발언이나 혈통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주장은 삼가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흥미로운 것은 강자와 현실권력에 관대한 일베와 달리 반다문화카페는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는 점이다. 반다문화 담론주체들은 자신들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주장을 현실정치세력 중 어느 곳도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혹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일종의 이념적 아노미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다. 담론주체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만 본다면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으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으며 또렷한 경향성 없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 요컨대 반다문화카페의 담론을 주도하는 주체들은 다소간 정치혐오적인 정치적 부동층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반공주의와 권위주의가 지배해온 한국사회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와 경쟁해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상당수 담론주체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을 기층우파 집단이라 불러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들은 좌파세력의 다문화 주장보다 우파세력의 다문화주의적 정책이나 캠페인에 더 격렬한 분노와 배신감을 드러낸다. 아래 인용문은 반다문화주의자들의 이념적 아노미를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확실히 좌우를 막론하고 다문화 세대라는 것을 또 한 번 느꼈습니다. 어느 사이트 정치게시판에서 어떤 우파인 사람과 얘기를 나눴는데요. 좌파는 이미 아예 포기했고, 우파와는 어느 정도의 의견일치를 예상하고 의견을 나눴습니다. (중략) 정말 놀랐습니다. 다문화주의에 매우 찬성의 입장이고 이는 주류 우파의 의견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주류 정당들(여야 포함)이 이미 다문화를 지지하고 있는 마당에 참으로 할 말을 잃게 되네요. 우파는 저와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할 거라 생각했지만 크게 착각한 듯합니다.”

 

“어느 사이트 정치게시판에서 어떤 우파와 얘기를 나눴는데요”, <다문화정책반대 카페>

이러한 이념적 아노미와 반다문화 담론 내부의 크고 작은 담론투쟁 등을 거치며 반다문화 담론은 자신과 적의 정체성을 점차 분명히 규정하면서 대항담론으로 성장해왔다. 이들 담론은 서유럽의 네오 나치나 일본 재특회(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와 강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념체계와 운동의 목표, 적대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운동으로서 맹아를 품고 있기도 하다.

아직까지 반다문화주의는 현실정치세력으로 응집되진 않았다. 정치세력화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글이 가끔 올라오긴 했지만, 오프라인에서의 정치적 조직화 등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한국사회에서 이주노동자 문제는 점점 더 첨예화하고 있다. 지난 십수 년간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응축되어온 증오의 에너지는 이미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반다문화주의 담론이 적절한 시기에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만나면 일거에 전면화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일베의 표층동기

2013년 봄 소위 ‘홍어택배’ 사진으로 사회를 경악시킨 뒤 여전히 위세를 과시하는 중인 일베는 이제 한국 넷우익의 ‘대표선수’가 되었다. 일베의 담론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여성혐오(“김치녀”, “탈김치” 등) 담론과 호남혐오 담론(“홍어” 등)이다. 인터넷 놀이문화의 “막장성”을 이어받은 이들이 혐오표현을 특정한 집단을 향해 뿜어내기 시작하면서 일베는 뜨겁고 거대한 사회문제가 됐다. 일베는 분명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내전’의 중심에 있고, 그래서 분석자들은 자꾸 이들을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통해서만’ 분석하려 든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물 밖으로 미끄러져 나갈 뿐이다. 이들은 ‘친목질 금지’를 통해 엄격하게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일베는 이념과 사상의 생산지가 아니며 이들을 움직이는 동기도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다. 일베는 오프라인에서 실명을 내걸고 활동하지 않는다. 이들의 ‘직계 조상’ 역시 어떤 이념집단이나 정치세력이 아니다. 디씨인사이드의 야구 갤러리, 막장 갤러리, 코미디 갤러리 같은 곳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네트워크 사회적 주체’이고 네트워크 사회론으로 규정하는 게 자연스럽다. 실제로 일베의 행태를 보면 정치세력이나 이념집단이 아니라 네트워크 아미(network army)1 에 훨씬 가깝다. 리처드 헌터에 따르면 네트워크 아미는 “지리적 제약 없이 특정한 이슈에 영향을 끼치는 집단”이다. 오픈소스 운동처럼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신상털기’, 해킹, 어뷰징(추천수 조작 등 정상운영을 방해하는 행위) 등의 일탈행위 역시 벌인다는 점에서 네트워크 아미는 ‘네티즌’이나 ‘현명한 군중(smart mobs)’과는 다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극우담론이 확산되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극우담론이 실제 활발히 유통되는 공간 내부의 동기부여와 작동원리는 구별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모티베이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구분하자면 전자를 ‘심층 동기(deep motivation)’, 후자를 ‘표층 동기(surface motivation)’라 말할 수도 있겠다. 두 층위를 구별하지 않으면 주체는 단순히 사회구조에 즉자적으로 반응하고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하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표층동기의 층위에서, 일베는 반다문화주의 커뮤니티 등과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물론 일베는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의 주요 무대인만큼 현실정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현실권력과 극우보수 세력은 분명히 일베를 ‘이용해서’ 정치적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일베 스스로가 이념에 기반한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조직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일베의 혐오표현들과 약자 배제의 언어들은 공적 영역에서 지지자들을 모을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정치세력화를 고민한다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테다. 누가 공론장에서 공공연히 그들의 담론을 지지하겠는가? 새누리당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정치인조차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일베는 아랑곳하지 않고 ‘막장성’을 하나의 유희이자 쾌락으로 소비하고 있다. 일베의 이러한 특이성을 설명하려면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운동론이나 인정투쟁론 대신 네트워크 사회의 특성과 맞물린 개념틀이 필요하다. 일베를 움직이는 표층동기로 내가 제시했던 것은 ‘주목경쟁(attention struggle)’이었다. ‘이념을 위해 주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주목을 위해 이념을 추구하는 온라인 공간’이 바로 일베라는 것이다.2

 

상상적 해법의 봉인해제

한국의 온라인 극우주의 및 극단주의를 논할 때 또 하나 주목해야할 세력은 ‘개신교 넷우익’이다. 본래 한국의 친일-친미 보수세력과 반공보수 성향 개신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적·이념적 친연성을 지닌다. 이승만 지지 세력은 독립촉성 기독교중앙협의회를 만들어 미군정과 분단세력에 적극 협조했고, 한민당에는 누구보다 개신교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해방 직후 이승만이 ‘반공’을 주창하고 나섰을 때 정권의 종교적 주체는 바로 개신교였다.”3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은 바로 이 역사성의 적통을 잇는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개신교 넷우익’은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약한 세력이다. 밝은인터넷세상만들기운동본부, 한국인터넷선교네트워크 등의 단체명으로 모여서 집단행동을 하는데, 한기총과는 행동양식과 전략이 상당히 다르다. 대표적인 리더로 안희환 목사가 있다. 이들 세력은 “밝은 인터넷 세상”을 표방하면서 대형교회 비판글을 블라인드 처리하거나 “바른 성문화”를 표방하면서 반동성애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동성애 조항을 문제 삼아 서울인권헌장을 사실상 폐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도 이들 개신교 넷우익들이었다. 이들은 반공주의, 반다문화, 반동성애 주장을 담은 선전물을 대량으로 뿌리면서 순식간에 거대한 넷우익 세력으로 부상했다. 개신교 넷우익은 사회운동으로서의 요건(‘정체성’ ‘적대자’ ‘사회적 목표’)을 명확히 갖추고 있는 만큼, 일베보다는 반다문화주의 커뮤니티와 더 유사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인터넷에 횡행하는 각종 극우주의와 극단주의가 발생한 경로와 표층적 동기는 제각각이다. 그들은 하나로 싸잡아버릴 정도로 동질적인 주체들이 아니다. 서로 갈등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심층동기의 수준에서 본다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종의 멘탈리티가 있다. 나는 그것을 통칭해 ‘상상된 착취(imagined exploitation)’라 부르고 있다. 이들은 공히 자신을 부당한 착취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받을 몫을 내부의 타자에게 빼앗겼다는 박탈감을 내면화한다. 이런 박탈감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왜곡된 인식, 소비자 정체성의 과잉에 기인하면서 또 동시에 그런 이데올로기를 통해 다시 박탈감이 강화되는 되먹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상상된 착취’는 체제모순에 대한 두 가지 무력한 대응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제시한 것, 즉 ‘전기적 해법(자기계발)’과 ‘상상적 해법(희생양 찾기)’4 중 후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상상적 착취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은 나보다 ‘자격(membership)’과 ‘능력(merit)’이 없는데 몫을 더 받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향해 증오와 혐오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실제 그들을 분류하고 착취하고 배제하는 주체는 내부의 타자들, 이를테면 이주노동자나 여성들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임에도 이들은 자본과 국가에 저항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격 있음/없음’과 ‘유능/무능’을 인준해주는 주체가 다름 아닌 자본과 국가이기 때문이다.

극단주의 전문가인 토마스 크룸케는 <경향신문> 인터뷰(2014년 9월 23일)에서 “소비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가 정체성과 인정에 커다란 공백을 남겨두었고, 그 공백으로 들어오는 것이 극우주의나 이슬람근본주의”라고 지적한다. 또 그는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저항하는 게 극우주의”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의 설명이 한국의 온라인 극단주의에 아주 잘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일베는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에 침투한 극단주의라기보다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발생하는 주목경쟁의 영역에 놓여있다. 그것은 정당성을 놓고 벌이는 투쟁이 아니라 쾌락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다. 반다문화주의 커뮤니티가 넷우익의 “우익”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일베는 넷우익의 “넷”에 좀 더 방점이 찍힌다. 그만큼 일베는 웹의 질적 특성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저항하는 게 극우”라는 그룸케의 말도 일베, 그리고 개신교 넷우익에는 적용하기가 난감하다. 웹이라는 환경, 극우정권, 극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 그들만큼 적응을 잘한 집단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확산된 온라인 극우주의와 극단주의는 이제 한국사회의 ‘상수’가 되었다. 섣불리 보편이론을 덧씌우거나 ‘괴물’ 취급을 하며 배제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은 극단주의가 확산되는 세계적인 조류에 속하면서도 다른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 양태를 보인다. 시간축을 통해서 보면 아주 낡은 모습과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섞여 있기도 하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관련 논의들이 여전히 너무 적다. 물론 저 집단들의 행태는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이다. 많은 시민들이 “모니터를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공적 지평에서 제대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 KISO 저널에 게시 및 수록된 글은 (사)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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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ichard Hunter, World Without Secrets: Business, Crime and Privacy in the Age of Ubiquitous Computing, 2002 [본문으로]
  2. 고도 정보화 사회에서 인간의 행동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토머스 데이븐포트 등의 경영학자들, 그리고 찰스 더버 등의 사회학자들이 발전시켜온 개념이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이다. 간단히 말해 타인의 주목을 추구하는 활동이 최우선 순위를 점하게 되는 경향성 또는 사회 환경을 가리킨다. 주목경제 개념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인지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먼의 ‘정보풍요’ 착상, 즉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관심이라는 자원이 부족해진다는 착안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정보를 소비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게도 수용자의 관심을 소비하는 것이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관심은 부족해진다.”(H. A. Simon, ‘Designing Organizations for an Information-Rich World(1971)’. 주목경제는 주목경쟁(attention struggle)을 통해 성립한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담백하고 점잖게 말하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관심을 받기 위해 발언수위나 행동이 점점 과장되거나 자극적인 형태가 된다. 심지어 주목을 받기 위해 일부러 비난받을 행동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소위 ‘노이즈 마케팅’이다. 주목경제에서 희소 자원은 타인의 관심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정보 초과잉 사회’에서 타인의 관심은 주체의 효능감을 강하게 자극하고 또 충족시킨다. 일베가 진보를 공격하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인터넷 공간에서 그쪽이 더 많은 관심(부정적인 관심이라 할지라도)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더 많은 관심이 더 많은 쾌락을’ 준다. 만일 관심경제가 커뮤니티의 최우선 작동원리라면 논리적·도덕적 정당성, 때로 금전적 이득도 부차적인 고려사항이 된다. 사상이나 이념도 후순위로 밀린다. 그래서 이념을 위해 주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주목을 위해 이념을 추구하는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52쪽 재인용) [본문으로]
  3. 서정민, ‘해방직후 한국 기독교계 동향’, <기독교사상>,1985 [본문으로]
  4. “자신의 행동에만 시선을 맞추고 있는 탓에 개인적인 삶의 모순들이 집단적으로 빚어낸 사회공간에서 주의를 돌린 개인들은 당연하게도 자신들이 처한 비극의 원인을 명백한 어떤 것, 따라서 개선 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곤경의 복잡성을 애써 축소하려 한다. ‘전기적인 해결책들’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효과적인 ‘체제모순에 대한 전기적인 해결책들’이 없기 때문이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효과적 해결 방안이 부족한 것을 상쇄하기 위해 상상의 해결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중략) 우리 시대는 희생양을 환영한다. 그 희생양이 사생활이 엉망인 정치가여도 좋고 비열한 거리와 거친 구역을 거니는 범죄자여도 좋고, ‘우리 안의 이방인’이어도 좋다.”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63쪽) [본문으로]
저자 : 박권일

프리 저널리스트,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88만원 세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