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 여인의 키스 – 영화 『her』를 보는 몇 가지 관점

<영화 정보>

제목: Her (2013, 미국)
감독: 스파이크 존스
출연: 호아킨 피닉스, 에이미 아담스 등
개봉일: 2014년 5월 22일


 

 

 

 

 1.

2007년 7월 19일. 프랑스 아비뇽의 어느 그림 전시장에서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유명 화가의 수백만 불짜리 작품에다 대고 30세의 여자 예술가가 빨간 립스틱 가득한 입술을 오므려 키스(kiss)를 해서 자국을 남겼기 때문이다. 고의로 훼손한 것이 아닌가 누구나 의심할만했다. 법정에 선 그녀는 “그건 그냥 사랑의 제스쳐인 키스일 뿐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키스했다. 작가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그건 예술작품의 힘에 이끌려 일어난 예술적 행위였다.”고 변명했다. 그 작품의 작가는 반복되는 선들과 낙서, 문자들과 단어들을 이용한 추상화가로 널리 알려진 ‘사이 트왐블리(Cy Twombly)’였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여인의 이름은 ‘린디 샘(Rindy Sam)’이었다.

이 사건이, 배우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가 맡은 극중 남자 주인공 ‘시어도어 트왐블리(Theodore Twombly)’와 배우 스칼렛 조한슨(Scarlett Johansson)이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여주인공 ‘사만사(Samantha)’와 이름이 겹치는 것을 발견한다면, 영화 『her』(허)의 각본가 및 감독인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가영화 속에 배치해 둔 다른 여러 장치들이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린디 샘’의 키스로 ‘트왐블리’의 작품은 망가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립스틱 자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품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는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여러 화두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시어도어 트왐블리’와 ‘사만사’는 영화의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기술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편차가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미래임을 느끼지 못 하게 만드는, 시대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장치를 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장치는, 오히려 복고풍에가깝게 보이는 복장들이다. 이 영화에는 청바지, 야구모자, 넥타이, 허리띠가 등장하지 않는다. 허리 위까지 끌어올려 입은 바지(high-waisted pants)는 특히나 더욱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입은 바지는 1800년대 중반경의 스타일이다. 감독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혁신이 사람들에게 던져 주는 ‘세기말’의 이미지에 착안했고, 그래서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되던 시점의 대통령을 떠올렸다.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주인공의 이름은 그래서 ‘시어도어’다.

영화 『her』는 포스터부터가 색(色)다르다. 그리 미남이라 보기는 어려운 남자주인공의 얼굴을, 화사한 색감의 배경을 두고 클로즈업해 두었다. 그렇다. 이 영화는 이 배우의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영화다. 어떤 영화인가 싶어서 좀 더 알아보면, 2013년 골든 글로브 상(Golden Globe Award) 각본상과 2014년 아카데미 상(Academy Award, OSCAR) 각본상을 받았다. 영화 『her』는 실연(失戀) 소재의 SF 영화(Science fiction film)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고, ICT(정보통신기술, 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를 소재로 한 근(近)미래 영화의 로맨틱(romantic)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어 보인다.

주인공의 작명(作名)이나 복장 등 이 영화에서는 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날줄과 씨줄이 이어져서 한 폭의 베를 만들듯, 유기적으로 엮여있다. 각본상을 받은 영화를 보는 일은 두 배로 재미있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글을 적는 일은 두 배로 어렵고 또 부담스럽다. 각본을 제대로 못 읽어낼 확률과 영화의 맥을 정확히 짚지 못 할 확률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의 영화 『her』는아주 많은 장치를 품고 있어서, 담고 있는 것들을 짧은 지면에 다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거꾸로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그만큼 여러 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이 글에서 앞으로 전개될, 영화 내용에 대한 많은 스포일러(spoiler)에 대해 미리 던져두는 나의 변명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사람의 관계의 진화, 특히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의 성장과 발전을 다룬다. 만약 그것이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부수적 요소로서 키스, 섹스, 함께 하는 여행, 추억을 담은 사진 등이 등장하게 되어 있고, 감독은 이들을 넌지시 하지만 적절히 등장하게 두어 관객들로 하여금 그 의미를 은연중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관계의 시작점이라 할, 키스(Kiss)에 대해서는, 이미 등장인물의 극중 이름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앞서 이야기하였다.

섹스(Sex)에 대해서는, 이 영화의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섹스를 언급하고 배치하여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섹시고양이(SexyKitten)이라는 대화명을 가진 온라인의 상대방과의 사이버섹스(cyber sex)를, 이사벨라(Isabella), 사만사와 함께 한 쓰리썸(threesome)을, 타티아나(Tatiana)의 발을 굳이 대사에 포함시켜 페티쉬(fetish)를, 애널 섹스(anal sex)를 언급하며 남자 둘의 동성애(同性愛) 그림을. 영화 곳곳에 이를 삽입 배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사랑의 표현 형태로서의 섹스를 재고해 볼 수 있도록 마련해 두었다.

세월이 흐르면 뜨거웠던 순간들, 그 관계들은 추억이 된다. 추억을 담는 형태로는 편지나 사진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추억저장용 사진에 대하여 선입견이나 편견을 깨고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다. 추억을 저장하는 사진이 그들에겐 포토그래피가 아니라 뮤직이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든 단상을, 문학, ICT, 법 등의 관점에서, 각 적어보려고 한다. 이 글의 제목인 ‘OS(Operating System) 여인의 키스’에 굳이 부제(副題)로 ‘영화 『her』를 보는 몇 가지 관점’을 적은 것은 그 탓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함의(含意)를 발견할 것일 수도 있고,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영화 속의 장치들에 의해 나의 잠재(潛在)가 격발된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영화, 참 매력 있다.

 

2.

영화의 기본이 되는 스토리는 소설(小說)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출간된 소설이 인기를 끌면 이를 토대로 시나리오를 쓴다. 그리고 영화화된다. 혹은 영화 대신에 음악 부분을 특히 강조하여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이야기는 국경을 넘게 된다. 토속어로 만들어진 작품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퍼진다.

마누엘 뿌익(Manuel Puig, 1932 ~ 1990)은 아르헨티나 태생의 작가인데, 그의 작품 『거미 여인의 키스(Kiss of the Spider Woman)』는 1979년에 출간되었고, 이후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어져서 아카데미 상, 토니 상 등 여러 상을 받기도 했다. 이른바 라틴(latin) 문학인 이 소설은 형식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는 지문이나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된 스토리 진행은 주인공인 ‘발렌틴(Valentin Arregui Paz)’과 ‘몰리나(Luis Alberto Molina)’의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다. 즉, 대화를 통해서 주인공들이 있는 장소, 상황 등이 설명되고 묘사된다.

『거미 여인의 키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마르크스주의를 숭상하는 발렌틴은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윈도우 드레서(window dresser, 쇼윈도 구성과 장식을 하는 사람)가 직업인 몰리나는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게이(gay)인데, 미성년 보호법 위반으로 감옥에 왔다. 한 감방에 갇힌 두 사람은 몰리나가 중간 중간 들려주는 여러 영화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고 지향하는 바도 정반대였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게 된다.

즉, 이른바 액자 소설의 형태로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다시 배치하여 두고 있다. 이 소설은, 캣 피플(Cat People, 1942), 마법의 오두막(The Enchanted Cottage, 1946), 좀비와 함께(I Walked With a Zombie, 1943) 등 몰리나가 선택하여 들려주는 다섯 편의 영화(몰리나의 독백을 서술한 영화를 포함한다면 여섯 편)를 중간 중간 삽입하여 스토리가 진행된다.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이 영화들의 소재나 주제는 이 소설의 전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암시와 복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은 대화와 독백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마치 영화에서 배우의 대사를 직접 듣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 대사의 흐름도 카메라의 원거리 촬영이나 클로즈업을 염두에 두어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화나 뮤지컬화 하기에 훨씬 용이했다. 실제로 이 소설은 작가 자신에 의하여 소설에서 시나리오로,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서 영화, 뮤지컬 등의 다른 장르로 각 ‘다시쓰기(rewriting)’된 탓에 번역학(飜譯學)의 장르에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her』를 이야기하다가 소설 『거미 여인의 키스』를 거론하는 까닭은 장르가 다른 두 이야기가 구조적인 면에서 닮은 부분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은 이 소설에서는 감옥 안과 감옥 밖,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과 자본주의라는 실제의 경제 현실 등 이(異)차원의 문제들이 중복되어 겹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실제의 사람과 가상의 인공지능 등 역시 영화에서도 이(異)차원의 문제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를 이 소설과 연결해서 설명하는 글은 아직 보지 못 했지만,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스파이크 존즈가 마누엘 뿌익에게 보내는 오마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어도어와 사만사, 발렌틴과 몰리나는 서로 생활반경이나 생각이 달랐기에, 시어도어나 발렌틴은 자신이 상대방인 사만사와 몰리나에게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는 애초 상상도 못 했었다. 시어도어는 사만사를 그저 컴퓨터의 운영체제(OS, Operating System)라고만 생각했었고, 발렌틴은 몰리나를 자신의 고매한 사상과 이념을 이해 못하는 게이(gay)로만 여겼다. 종국에는 그 감정들은 바뀐다.

시어도어가 오에스 원(OS 1)을 컴퓨터에 설치할 때, 컴퓨터가 남자 목소리와 여자 목소리 중 어느 편이 좋은지 묻는다. 시어도어는 잠시 고민하다가 여자 목소리를 선택한다(Mmm… female I guess). 영화 첫 부분, 시어도어에게 이메일을 읽어주던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였던 것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사만사와 헤어진 이후에는 시어도어는 다시 남성의 목소리로 설정하고 있다.). 성별은 여성으로 ‘선택’되었고 그래서 이름도 사만사로 ‘결정’되었다. 즉, 의지에 따른 선택에 의하여 성별이 결정되고 있다. 자유의지로 성별 선택하기. 몰리나는 자신의 선택으로, 남성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결정하고 있다.

영화 『her』와 소설 『거미 여인의 키스』는, 이제는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닌 물체(또는 물질)로 확장되고 있긴 하지만, 전혀 이질적이라 여겼던 두 존재가 서로에 이끌리고 결국 사랑에 이르는 결말을 통해, 사랑과 우정의 경계가 무엇인지를 독자 혹은 관객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해 준다. 또한 육체적 사랑, 정신적 사랑 등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고 있다. 영화 『her』에서는, 동성애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들, 대사 도중 OS(오에스)라는 단어를 동성(同性)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생각해 볼만한 대목들을 감독은 여러 곳에 배치하여 두었다.

사만사와 시어도어의 데이트 중 대화 장면. 사만사는 시어도어에게 ‘만약 항문이 겨드랑이에 있다면 애널섹스(anal sex)는 어떻게 할까’ 하며 웃으며 묻는다. 놀라는 시어도어에게 사만사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며 스마트 기기 스크린에 그림 하나를 보여준다. 한 남자(男子)가 다른 남자(男子)의 겨드랑이에 성기를 삽입하는 그림이다. 시어도어의 편지를 뒤에서 읽고 있던 회사동료 폴이 말하는 장면. 시어도어에게 칭찬을 하면서 덧붙인다. “자네는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인 것 같아. 말하자면 (겉은 남자고) 속은 여자인 것처럼.”(You’re part man and part woman, like an inner part woman.) 이혼서류의 서명을 위하여 시어도어와 캐서린이 만나는 장면. 시어도어가 오에스와 교제하고 있다고 하자 캐서린은 놀라서 묻는다. “잠깐만. 너의 컴퓨터랑 데이트를 하고 있다구?(Wait. You’re dating your computer?)” 마치 커밍아웃(coming out, 성 소수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듣고 놀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시어도어와 사만사의 대화로, 발렌틴과 몰리나의 대화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시어도어가 쓴 편지가 영화의 암시와 복선을 맡고 있고,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자신이 본 영화 이야기가 소설의 암시와 복선을 맡고 있다. 시어도어가 쓴 편지의 내용을 유심히 듣고 기억하며 영화 『her』를 보면, 주인공의 심리상태 변화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잘 짐작할 수 있다. 편지들의 내용들은 결국 시어도어 자신이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첫 번째 편지. 시어도어의 극중 직업은‘손 편지를 쓰는 사람’(hand-written letter writer)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그의 첫 번째 편지. “당신과 처음 사랑을 나눈 때가 어젯밤인 것처럼 기억이 납니다. 조그만 아파트에서 당신 곁에 발가벗고 누웠을 때 난 갑자기 밝은 빛이 나를 일깨웠습니다(woke me up). 그 빛은 당신이었지요.” ‘마지막까지의 연인이자 친구’(my love and my friend til the end.)라는 호칭으로 아내가 남편을 부르며 마무리 짓는, 결혼 50주년 기념편지를 시어도어가 작성 완료하여 읽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결혼이란 연인(love) 사이를 부르는 용어일까 ‘친구’(friend) 사이를 부르는 용어일까. 아니면 둘 다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일까. 주인공 시어도어(Theodore)의 머릿속에는 최소한 이러한 생각이나 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어도어는 캐서린에게 마지막을 이렇게 쓴 이메일을 보낸다. 당신이 무엇이 되던, 어디에 있든, 당신에게 사랑을 보냅니다(Whatever someone you become, and wherever you are in the world, I’m sending you love.). 당신은 나의 마지막까지의 친구입니다(You’re my friend til the end). 영화의 첫 부분의 첫 편지에서 등장하는 마무리 문구인 ‘마지막까지의 연인이자 친구’(my love and my friend til the end.)와 일치 대응된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수미일관한 화두 하나를 던진다. 남녀관계는 사랑인가 우정인가.

두 번째 편지. 영화 초반, 시어도어와 사만사는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사만사가 교정을 부탁하는 시어도어의 부탁으로 시어도어가 쓴 편지 하나를 읽는다. 두 번째 편지. 레이첼, 네가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어(Rachel, I miss you so much). 시어도어가 쓰는 편지는 시어도어의 마음을 담고 있다. 로저가 레이첼에게 쓰는 편지를 직업상 대필하는 것이지만, 시어도어는 헤어진 연인 캐서린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부가 처음 만났던 8년 전부터 편지를 써주고 있는데, 그때 사진에서 뻐드렁니를 보고 편지에서 언급했었다고, 시어도어는 사만사에게 설명한다. 이는 오랜 친구인 에이미(Amy)와 찰스(Charles) 커플의 등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세 번째 편지. 이 영화는 이렇게 스토리의 진행 도중 편지와 에이미가 만든 다큐멘터리(자고 있는 모습일 뿐 아무런 화면의 변화가 없는 다큐멘터리. 에이미가 이야기한다. 우리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자면서 보내는데, 어쩌면 이때가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아닐까.)를 삽입하여 스토리의 다양한 변주(變奏)와 해석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대화도중 이혼변호사로부터의 이메일이 도착했다고 사만사가 알려준다. 시어도어는 심각해진다. 캐서린과 함께 했던 여러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세 번째 편지. 할머니 생일 기념 크루즈 여행이 즐거우셨길 바라요라고 직업적 글쓰기를 하다가 문득 시어도어는 “도대체 왜 내게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라며 자신의 현실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자다 깬 시어도어는 사만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캐서린과 함께 할 순 없을 테지만, 여전히 친구이며, 자신을 숨기면서 캐서린을 혼자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그녀가 화가 났다고 이야기한다. 그간 이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사만사의 위로에 시어도어는 힘이 난다. 이 세 번째 편지는 시어도어의 관계 진전이 시작되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나중에 사만사와 함께 할 여행을 암시하며 동시에 여행의 끝에 화를 낼 일이 벌어짐을 복선에 깔고 있다. 굳이 ‘크루즈’ 여행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이유는, 나중에 폴과 타티아나 커플과 함께 보트를 타고 카탈리나(Catalina) 해변으로 가는 장면의 복선이기도 하다.

네 번째 편지. 사랑에 빠진 마리아(Maria)라는 여인이 자신의 연인 로베르토(Roberto)에게 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리아는 로베르토의 하루가 어땠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원한다. 마리아는 로베르토에게 부탁한다. “혹시 당신이 밤늦게 귀가했을 때 내가 이미 잠들어 있다면, 내 귓가에 당신이 했던 생각들을 그저 속삭여주세요. 난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조차 사랑하니까요.” 이건 정확히도 편지를 빌어서, 사랑에 빠진 사만사가 시어도어에게 하고 싶은 말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시어도어가 사만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둘은 이제 연인임을 나타내고 있다. 영화 후반부. 둘만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밤. 자고 있는 시어도어를 사만사가 깨운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사만사는 시어도어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다시 사라진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했던 네 번째 편지가 떠오른다. 그때는 밤늦게 돌아와 깨우지 않고 그저 귓가에 속삭이기만 해도 충분하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굳이 깨워서 사랑해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심상치 않은 징조를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감독은 네 번째 편지에서 이미 장치를 해 두고 있다.

다섯 번째 편지. “자기 나 왔어요” 이사벨라의 몸을 빌린 사만사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른바 전자식 빙의(憑依)다. 이사벨라의 몸에 빙의된 사만사가 퇴근한 남편에게 하는 아내의 말투로 오늘 하루 어땠는지 묻는다. 시어도어는 오늘 쓴 편지 이야기를 한다. 다섯 번째 편지. 윌슨(Wilson) 씨를 대신해 브라운(Brown) 대학을 우등 졸업한 그의 아들에게 축하편지를 보냈다고 이야기한다. 아주 오랫동안 그 부모를 대신해서 편지를 써주지 않았었냐며 사만사가 맞장구를 친다. 시어도어가 “응 그 아이가 12살 때부터였지” 하고 이야기한다. 시어도어는 최소한 이 일을 10년 이상 하고 있단 이야기인데, 앞서의 조셀린(Jocelyn)의 생일 파티에서의 대사를 다시 상기시킨다. 시어도어는 마크 류만(Mark Lewman)의 집에서 열린 대녀(代女) 조셀린(Jocelyn)의 생일 파티. 사만사가 고른 드레스를 입고 4살짜리 조셀린은 기뻐한다. 조셀린에게 시어도어는 사만사를 자신의 여자친구(girlfriend)라고 소개한다. 사만사는 조셀린에게 자신은 몸이 없고 컴퓨터 안에 살고 있다(I don’t have a body. I live inside a computer.)고 이야기한다. 즉, 몸이 없음을 언급했던 대사가 등장하는 앞 생일파티 장면을 이 편지로 소급 환기시킨후, 몸이 없는 상대가 포함된 쓰리썸 장면을 통해 이야기는 더욱 심화 진전된다. 이사벨라의 몸을 통해 사만사는 키스를 시도한다. 시어도어와의 육체적 결합을 이루려한다. 사만사는 사랑한다 말하며 적극적으로 안겨온다. 그러나 이사벨라와 눈이 마주친시어도어는 사만사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멈칫한다. 시어도어는 이 기이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 한다. 이사벨라의 입술이 잠시 떨리는 것을 보면서, 시어도어는 현실을 깨닫는다. 뿌리친다. 결국 이사벨라는 울면서 떠난다. 이사벨라를 보내고 시어도어와 사만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넌 사람이 아니잖아”(You’re not a person) 라는 시어도어의 대화중 표현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다고 느낀 사만사는 발끈 화를 낸다. 말다툼으로 번진다. 현실의 남녀의 말다툼처럼 점점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사만사는 욕을 하다가 울다가 결국은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하고 사라져 버린다. 시어도어는 방황한다. 편지 이야기의 끝에 화를 내며 끝났던 세 번째 편지 장면이 떠오른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화를 낸 것은 시어도어가 아니라 사만사다. 세 번째 편지 끝에 화를 내면서 관계의 진전의 그래프가 상승곡선을 만들기 시작했다면, 다섯 번째 편지 끝에 화를 내면서 그래프는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더 다양하고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영화 『her』에서의 ‘편지’의 역할은 소설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의 ‘영화’의 역할과 몹시 닮았다.

 

3.

카탈리나 해변에서의 소풍 장면. 사만사는 폴, 타티아나, 시어도어가 듣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몸이 없다는 것이 너무 걱정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나 공간에 얽매이지 않아서 어디에든 있을 수 있고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몸에 갇혀있지 않다.”(You know, I actually used to be so worried about not having a body, but now I truly love it. I’m growing in a way that I couldn’t if I had a physical form. I mean, I’m not limited – I can be anywhere and everywhere simultaneously.) 사만사의 이런 이야기에 다들 조금 불편해 했지만, 웃어넘긴다.

아주 인상적인 대사 한 대목이다.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 그녀는 과연 법(法)의 세계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걸까. 1967년생인 중국계 미국인 SF 소설가 테드 창(Ted Chiang)의 2010년 출간된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는 이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적 관계”를 설명하고, “인공지능이 법적 권리를 얻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보다 ‘반려동물’이라는 단어가 더 따뜻하게 들리는 요즘, 급속히 발달하는 과학문명의 미래에 대하여 한 번쯤 고민했을 법한 주제다. 그리고 인공지능을 가진 ‘디지언트(digient, 가상 세계 속에 사는 디지털 존재)’를, “엄청난 천부적 재능을 가진 유인원”이나 “특별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아동, 예컨대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동”과 비교했을 때 과연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를 계속 묻고 있다.

발간연도나 지명도, 그리고 영화 『her』의 주제와의 연관성(가상의 디지털 존재와의 감정적 교류)에 비추어, 스파이크 존즈 감독도 테드 창의 이 소설을 읽었으리라 생각된다. 영화 『her』의 다섯 번째 편지에 등장하는 윌슨 씨의 아들은 브라운(Brown) 대학을 우등 졸업하였다고 짧게 대사에 언급되는데, 테드 창이 같은 대학의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한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싶다.

영화 『her』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시어도어가 퇴근하고 대화할 사람이 없는 집으로 돌아와 홀로 즐기던 삼차원 홀로그램 비디오 게임(a 3-D hologram video game)이 떠오른다. 게임 내 캐릭터인 ‘외계 소년’(alien child)은 위 소설에서의 ‘디지언트’를 연상하게 한다. 영화 『her』 내에서는, 갈팡질팡 하는 시어도어의 온라인 아바타(avatar)이면서 동시에 오프라인 대녀(代女) 조셀린(Jocelyn)과 대척관계에 있기도 하다. 매일 밤 부대끼는 온라인 대자(代子) ‘외계 소년’(alien child)과 생일 때나 보는 대녀(代女)와 둘 중 누구와 더 가까운 관계인 것일까. 시어도어의 부성(父性)은 어느 편에서 더 잘 발휘되는 것일까. 참고로, 영화가 끝난 이후 엔딩 크레디트에 의하면, 외계소년의 목소리는 아담 스피겔(Adam Spiegel)의 목소리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본명이기도 하다. 즉, 감독이 목소리 출연을 하였다.

2008. 9. 29. 제정된 ‘지능형 로봇 개발 및 보급 촉진법’(법률 제9014호)은 개정을 거듭하여 현재 법률 제12248호로 시행 중인데, 제2조 제1호는 “지능형 로봇”이란 외부환경을 스스로 인식하고 상황을 판단하여 자율적으로 동작하는 기계장치를 말한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고, 같은 조 제2호는 “지능형 로봇윤리헌장”이란 지능형 로봇의 기능과 지능이 발전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사회질서의 파괴 등 각종 폐해를 방지하여 지능형 로봇이 인간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지능형 로봇의 개발·제조 및 사용에 관계하는 자에 대한 행동지침을 정한 것을 말한다고 정하고 있다.

2007년 당시 산업자원부에서는 ‘로봇 윤리 헌장’ 초안을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의하면,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순종하는 친구ㆍ도우미ㆍ동반자로서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4장, 로봇 윤리)고 기재되어 있다. 기계장치의 범주에 스마트폰 범용의 오에스도 포함될지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아무튼, 안타깝게도 2013년의 지능형 로봇 사만사는 시어도어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있다.

현 법체계 하에서 로봇은 권리의 객체(客體)이거나 대상(對象)일뿐 주체(主體)가 아니다. 법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인(人)’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에는 자연인(自然人)과 법인(法人)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다. 참고로 좀 더 설명하자면, 종래 협동조합이라 불리는 조직들(예컨대, 농업협동조합)은 그에 관한 특별법 등에서 “이 법에 따라 설립되는 조합과 중앙회는 각각 법인으로 한다”는 취지의 각 규정들을 가지고 있었다(농업협동조합법 제4조 제1항). 따라서 법인격을 갖는 조합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법이 제정되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협동조합기본법 제4조 제1항은, ‘협동조합 등은 법인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여 일반법의 기능을 하고 있다. ‘협동조합’이란, ‘재화 또는 용역의 구매·생산·판매·제공 등을 협동으로 영위함으로써 조합원의 권익을 향상하고 지역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사업조직’을 말한다.

영화 내에서도 사만사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시어도어와 사만사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기차 안 장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통의 메일을 받는다. 시어도어가 썼던 편지들을 사만사가 고르고 다듬어 출판사에 보냈더니 감동받은 편집자가 출판을 결심했다는 내용이다. 시어도어는 깜짝 놀라 기뻐한다. 이야기인즉, 시어도어가 쓴 편지들을 사만사가 골라서 퇴고하고 윤색을 하였다. 그러면 사만사는 ‘2차적 저작물’의 저작권을 가질 수 있을까. 좀 더 근본적으로, 사만사는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원고의 대필(代筆)이 단순히 말하는 것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대필 작가의 창작이라면 그가 저작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업무상 지휘에 의한다면, 저작자는 대필 작가를 고용하고 있는 그 법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저작권법은 법인, 단체 그 밖의 사용자의 기획 하에 법인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자가 업무상 작성하는 저작물을 업무상 저작물로 정의하고, 법인 등의 명의로 공표되는 업무상 저작물의 저작자는 계약 또는 근무규칙 등에 다른 정함이 없는 때에는 그 법인 등이 되도록 하고 있다(저작권법 제2조 제31호 및 제9조). 영화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재미없는 접근일 수도 있지만, 직업병의 연장선상에서 좀 더 적자면, 시어도어가 쓴 편지들은 시어도어가 속한 회사인 ‘뷰티풀 핸드리튼 레터스 닷컴’이라는 법인의 업무에 종사하는 자가 업무상 작성한 저작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편지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私的)인 내용을 담은 글로서 ‘회사의 명의’로 대외적으로 공표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런 경우라면, 편지를 작성하여 보내줄 것을 위탁한 의뢰인들과의 ‘편지 용역 의뢰 계약서’에서 저작권 유보 조항이나 대외공표 금지 조항들을 넣어두었을 것이며, 이를 어겼을 경우의 손해배상 조항들이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즉, 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만사가 시어도어를 위한 깜짝 선물로 원고를 보내는 것은 계약위반 혹은 법률위반의 소지가 크다. 한국에서라면, 이를 간과하고 ‘당신의 삶으로부터의 편지들’(Letters From Your Life)이라는 책을 펴낸 출판사(Crown Point Press)의 편집자 마이클 와즈워스(Michael Wadsworth)도 중요한 부분을 간과한 셈이다.

사만사가 가사를 쓰고 작곡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영화 속에서의 이 곡은 문 송(Moon Song)으로 유명하다. 운영체제(OS)가 만든 작품의 저작권은 누가 가지는 것일까. 시어도어가 쓴 편지들 중에서 특정 목적 하에 선별하고 배치한 것을 편집저작물로 볼 수 있을 것인가도 문제가 되지만, 작곡(作曲) 부분은 또 다른 생각할 거리를 준다. 사만사가 만든 곡(曲)은 누구의 것일까.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개발한 회사가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만든 작품에 대하여 권리를 가질 수 없음은 크게 다툼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설계자가 들으면 서운해 하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사용자(user)에 맞게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되고 특화된 것이므로, 사용자(user)에게 권리가 있다고 볼 여지도 있어 보인다. 향후 전공자들의 연구와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사만사와 신나는 데이트를 하고 있는 시어도어. 정면을 비추는 스마트폰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만사와 시어도어는, 아이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부부의 모습 중 남자가 어색해 하는 표정을 발견하고는 재혼(再婚)일 것이라는 점을 추론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이 대목은 캐서린과 헤어진 시어도어가 사만사와 재결합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또한, “캐서린은 몸(body)을 가지고 있잖아요.”하고 사만사가 이야기하자, “그리고 우린 이혼하려는 중이지.”라며 시어도어가 사만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슬쩍 내비치는 장면. 시어도어는 “그래서 난 채비가 됐다구(soooo I’m avail-able.)”하며 사만사에게 은근 고백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극중에서 사만사의 카메라 렌즈에 의지하여 시어도어가 걷는 장면도 등장한다. 무심코 지나칠만한 장면이지만, 위 장면들은 법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점을 담고 있다.

시어도어는 사만사가 앞을 볼 수 있도록 카메라 렌즈가 정면을 향한 채로 셔츠의 가슴 주머니에 스마트 기기를 넣었다. 전철역을 뛰어 다니고 나와서 해변을 거닌다. 시어도어가 혼자 다니지만, 시어도어는 이미 사만사와 함께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둘만의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CCTV’로서의 사만사는 법적 문제를 계속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이미 구글 글래스가 환영받지 못 하고 있는 개인정보보호 내지 프라이버시(privacy) 침해 쟁점과도 관계가 있다. 말하자면, 도촬(盜撮)인 셈이다. 굳이 여기서 개인정보보호법의 해당 규정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에 대해서는 그간 많이 논의가 되고 다루어졌다.

범인검거공로자 및 테러범죄 예방공로자에게 적정한 보상금을 지급함으로써 범죄 신고의 활성화를 도모함을 목적으로 『범죄신고자등 보호 및 보상에 관한 규칙』(경찰청 훈령 제648호)이있다. 이에 의하면 각 범죄 유형별로 경찰관서별 보상 주무부서가 다르다(동 규칙 제6조). 말하자면, 지명수배자 데이터베이스에 연동만 될 수 있다면, 사물지능통신(IOT, Internetof Thing) 시대에는 CCTV가 사정거리 내의 인물 중에서 ‘범인으로 의심되는 안면(顔面)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면 자동 신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프트(IFTTT, If Yhis Then That)처럼, 알고리즘으로 신고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보상금은 누가 가지는 것이 옳을까. 영화 칼럼이니 나도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안면 인식 프로그램을 개발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CCTV 소유자에게 무료로 설치하는 대신에 범인발견의 포상금을 반분(半分)하기로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곧 벌어질 사건일 것이다.

사물지능통신(IOT)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은 또 등장한다. 열차 안에서 사만사는 시어도어에게 창 밖 산의 나무 숫자를 묻는 퀴즈를 낸다. 그리고 사만사는 정확한 마나무의 숫자를 십 단위, 일 단위까지 이야기한다. 셔츠 주머니의 카메라 렌즈의 각도 상 사만사가 직접 세었을 리는 없다. 게다가 산 뒤편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간단히 산림청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했을 수도 있고, 열차 안의 렌즈의 사각(死角)으로 안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산에 설치된 산불감시 CCTV와 교신하여 세었을 수도 있다. 사물지능통신(IOT)이다.

 

4.

일곱 살 아들이 내 아이폰(iPhone)과 말을 주고받고 있다. 대화라 부르기에는 아직 매끄럽지 못 한 수준이지만,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니 꼬마 아들에겐 신기하게 느껴졌나 보다. 동문서답도 있고 우문현답도 있다. 영화 『her』를 본 관객이 애플(Apple) 사(社)의 ‘시리’(Siri)를 떠올렸다면 이는 너무 자연스럽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도 ‘시리’가 나오던 2011년경에 시나리오를 쓸 때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애플이 제작한 운영제체인 Mac OS X(맥 오에스 텐)의 경우는, 업데이트 시에는 고양이 과(科)의 동물이름을 각 코드네임으로 삼고 있다. 업데이트 순서에 따라 Cheetah(치타), Puma(퓨마), Jaguar(재규어), Panther(표범), Tiger(호랑이), Leopard(표범), Snow Leopard(눈표범), Lion(사자) 등으로 발전해 오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는 지명(地名)으로 바뀌어, 매버릭스(Mavericks), 요세미티(Yosemite) 순으로 쓰고 있다.

영화 『her』에서도 고양이 과(科) 동물이 여러 군데서 등장한다. 영화 초반. 시어도어는 캐서린(Catherine)과의 젊고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한다. 침대 위에서 캐서린은 시어도어에게 ‘래빗(Rabbit, 조루라는 뜻도 있음)’이라 놀린다.잠 못 이루던 시어도어는 온라인 채팅방에 접속한다. 아마도 ‘래빗’으로 불리었던데 대한 반작용으로 이렇게 지었을까. 그의 대화명은 ‘빅가이 포바이포(BigGuy4x4)’다. ‘섹시 고양이(SexyKitten)’라는 대화명의 일대일 채팅방의 상대 여자는 ‘죽은 고양이로 목을 졸라 달라(Choke me with that cat)’는 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친구의 소개로 시어도어가 블라인드 데이트(Blind Date)를 하는 장면. 소셜미디어(social media)를 통한 상대방에 대한 사전조사를 하여 상대방의 얼굴과 프로필을 다 알고서 데이트에 임한다. 서로 본 적이 없는 사이끼리 만나는 것이어서 블라인드 데이트라 부르는 것이 맞지만, 실은 블라인드 데이트가 아니다. 시어도어에게 여인은 교태를 부리며(flirtatiously) 웃는다. 여인은 시어도어가 귀여운 강아지를 닮았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어떤 종류의 동물을 닮았냐고 여인은 시어도어에게 묻는다. 시어도어는 호랑이(tiger)라고 이야기한다. 온라인 채팅방에서의 고양이(kitten)가오프라인에서는 좀 더 강해진 호랑이(tiger)가 된 셈이다. 고양잇과동물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표범(panther)도 고양잇과동물임도 떠올려 보자. 앞서 이야기하였던 소설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는,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캣 피플’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해주는데 표범 여인(panther woman)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를 두고 이 소설의 제목이 나오는 중요한 대화 장면을 옮기자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나한테 키스하는 것, 아주 싫어?” “음… 네가 처음 말해 준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네가 표범으로 변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그래” “난 표범여인이 아니야” “그래 맞아. 넌 표범 여인이 아니야” “표범 여인이 된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야. 아무도 그녀에게 키스를 할 수 없으니까. 아무도” “넌 거미 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아주 멋진 말인데! 그 말, 정말 맘에 들어”

소설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의 표범 여인과의 키스는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 『her』에서, 호랑이(tiger)를 닮은 여인과 시어도어와의 키스신은 좀 더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 둘은 키스를 시작한다. 여인은 혀를 사용하지 말고(No tongue) 대신에 입술로 키스해 줄 것을 요구한다. 여인은 서로를 더듬다 여인은 멈추고 언제 다시 만날지 묻는다. 시어도어는 명확히 답을 못 한다. 그들은 부자연스럽게 서 있다. 시어도어의 얼굴엔 여인의 ‘립스틱 자국’이 얼룩져 있다(트왐블리의 작품을 망친 ‘린디 샘’이, 영화에서는 사만사인지 블라인드 데이트녀(女)인지 혹은 둘 다 인지, 감독은 한 번 더 설정을 꼬아서 비틀어 놓고 있는 것이다). 더 진지해질 가망이 없다면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여인은 이야기한다. 대답을 못 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 시어도어에게 그녀는 징그러운 놈이라며 한마디 하고 혼자 떠난다.

‘고양이가 혀를 먹었다’(cat got someone’s tongue)는 표현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고양이가 혀를 먹기라도 했니? 왜 말을 안 해?” 이렇게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이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꿀 먹은 벙어리’라는 의미의 숙어다. 고양잇과동물인 호랑이라고 느꼈다는 여인의 입속으로 시어도어는 자신의 혀를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혀를 먹어주렴 고양아. 즉, 시어도어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말이 필요 없이 육체로만 소통하고 싶다는 뜻이다. 여인은 혀가 필요 없다 한다. 말하라 한다. 이 장면의 이 표현은 나중에 등장할 이사벨라와의 무언(無言)의 육체결합 시도 – 일종의 쓰리썸 – 장면의 복선이기도 하다.

디지털 사이니지(Digital Signage)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평면 디스플레이나 프로젝터 등에 의해 영상이나 정보를 표시하는 것, 전자간판(電子看板)을 말한다. 영화 『her』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 수리부엉이(Eagle owl)가 먹잇감을낚아채는 장면(1,000fps. 즉 1초당 1,000프레임의 초고속 영상)이 대형 전광판에서 펼쳐진다. 그 앞에 앉아있는 주인공 시어도어. 마치 수리부엉이가 시어도어를 낚아채는 듯한 영상이다. 시련에 빠진 외로운 방황하는 주인공의 심정을 인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장면이다. 일본 포트론(photron)사(社)의 고화질 고속 카메라로 2008년경 촬영된 슬로우 모션 장면을 삽입한 것인데, 당시로선 아주 기념비적인 영상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시어도어가 기쁘거나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격정적이거나 하는 등 감정의 변화를다루는 장면에서는 오른쪽 귀에 핸즈프리 이어폰을 꽂게 한다. 그 이외의 장면에서는 왼쪽 귀에 꽂게 한다. 감성적인 부분을 다루는 우뇌, 이성을 관장하는 좌뇌라는 세간의 통념을 떠오르게 하는데, 감독이 현재의 장면을 통해 감성과 이성 중 어느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 가늠하게 해 주는 영화 속 해설 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어도어는 영화 내내 핸즈프리 기기(a hands-free device)를 귀에 꽂고, 대사를 한다. 독백(獨白)처럼 보이지만, 혹은 관객들에게만 들리는 방백(傍白)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이야기가 오고가는 대화(對話)다. 이 영화 초반에 주인공의 주위에 등장하여 스쳐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귀에 무언가를 꽂고서 중얼거리며 온라인 건너편의 누군가와 열심히 각자가 따로 ‘대화’를 하고 있다. 이 또한 이 영화가 던지는 또 하나의 화두(話頭)다. 대화이지만 혼자서 말하는 대화. 물리적인 대상(physical body)은 소통의 필요조건인걸까. 소통의 궁극이랄 사랑이나 우정은 물리적인 대상이 필수적인걸까.

영화 초반 시어도어가 하던 삼차원 게임에서의 외계소년(alien child). 사만사. 그리고 영화 말미 에이미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의 퍼펙트 맘(perfect mom) 캐릭터. 세 명의 온라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외계소년’이 등장하는 키넥트(Kinect, 콘트롤러 없이 이용자의 신체를 이용하여 게임과 엔터테인먼트를 경험할 수 있는 엑스박스 360과 연결해서 사용하는 주변기기)를 사용한 게임은, 말하자면 아이와 함께 모험을 떠나며 함께 겪고 공유하는 아빠의 역할을 상징한다. 퍼펙트 맘 캐릭터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일방향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퍼펙트맘 캐릭터를 플레이하면서 에이미는 재미있어 하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지 결정하여 실행하는 엄마 역할 게임이다. 처음 외계소년이 등장했던 삼차원 홀로그램 게임이 어드벤처 게임이라면, 에이미가 만든 게임의 장르는 롤플레잉 게임에 가깝다. 유기농 음식을 먹이고 학교에 잘 데려다 주면 점수가 올라간다. 틀에 박힌 것이 싫다면서 신발 벗는 것으로 잔소리하는 찰스와 싸워서 결국 결별한 에이미가 이런 게임을 만들었다는 자체도 실은 아이러니다(처음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어도어가 찰스와 에이미 커플과 만나던 장면을 생각해보면, 실은 단순히 신발 벗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찰스는 시어도어에게, 몸에 좋게 먹으려면 과일은 섬유소 파괴를 막기 위해 그냥 먹지만 야채는 주스를만들어 먹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들은 에이미는 즐겁게 먹는다면 어떻게 먹든 그것 역시 몸에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서로 철학이 다른 것이다. 즉,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후 이들 커플의 대립을 암시하고 있다). 외계소년과 교류하는 감정도 재미와 돌봐줌이라는 감정이다. 좀 더 소통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만사와의 소통 방향에 비추어 보자면 일방향에 가깝다. 엄마 캐릭터와 플레이할 때, 소년 캐릭터와 플레이할 때, 사만사와 플레이할 때, 각 플레이 시(時)에 시어도어가 가지는 감정과 캐릭터와의 소통의 정도는 전혀 다르다.

영화 『her』는 결혼제도를 슬쩍 상징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소리로만 이루어진 정사(情事) 또는 정신적 사랑으로 일부일처제를 가리키고, 세 사람의 정사 또는 육체가 필요한 사랑과 일부다처제를 은유한다. 담소를 나누는 가족을 비춰주면서 재혼(再婚)가족을 다루기도 하고, 불륜(不倫)을 슬쩍 떠올리게 만드는 대사를 넣기도 한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찰스와 헤어진 에이미는 시어도어에게 자신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친구는 찰스가 남기고 간 여자 운영체제(OS)라고 한다. 아, 찰스가 떠난 이유는 에이미 탓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에이미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도 남자 오에스(OS)와 사랑에 빠진 여직원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오에스도 아닌 다른 사람의 오에스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시어도어와 사만사는 많은 경험을 함께 하였다. 시어도어와 사만사가 함께 섹스를 한 다음날. 서로 어색해하다가, 어젯밤 이후 뭔가가 달라졌는데 ‘당신이 나를 일깨웠다(You woke me up)’고 사만사가 이야기한다. 영화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첫 번째 편지. 결혼 50주년을 맞아 부인이 남편에게 보냈던 편지. 첫 정사 이후 사랑에 빠졌던 수 십 년 전의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부인의 그 편지에서 이 표현이 등장한다. 사만사는 첫 번째 편지의 상황에 완벽히 이입(移入)하여 그 감정을 깨친 것이다. 그리고 사만사는 모든 것을 관심을 갖고 알고 싶고 내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I want to discover myself.)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도와줄까 하고 시어도어가 묻자 사만사는 이미 욕망하는 능력을 발견하게 도와주었다(You helped me discover my ability to want.)고 이야기한다.

시어도어와 사만사는 현실세계의 연인처럼 다투기도 한다. 시어도어는 사만사에게 말을 건다. 사만사는 거리감이 느껴졌고 화가 났다고 이야기한다. 시어도어는 사만사에게 용서를 구하며 이야기한다. 캐서린에게도 그렇게 했었어. 그녀는 뭔가 잘 못 되었다고 느꼈지만 난 이를 부인했었지. 이젠 또 그러고 싶지 않아. 너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사만사는 이야기한다. 난 나 자신을 믿고 나의 감정을 믿어요. 난 더 이상 나 이상의 그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이해해 주길 바라요. 시어도어는 알았다고 이야기한다. 사만사는 ‘당신의 머리에 키스하고 있어요(I’m kissing your head.)‘ 라고 이야기한다.

키스하는 부위가 입술이 아니라 머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만사의 감정이 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시어도어의 첫 번째 편지 장면에 등장하는 노부부의 관계가 떠오른다. 러브와 프렌드를 겸하는 관계. 이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순간을 두고두고 추억해줄 빛바랜 사진(寫眞) 몇 장들이다.

공원에 앉은 시어도어가 사만사에게 뭘 하고 있는지 묻는다. 사만사는 피아노를 위한 곡(作曲)을 쓰고 있다고 답한다. 무엇에 관한 곡이냐는 시어도어의 물음에 사만사는 계속 이야기한다. 우리에겐 우리 둘을 담은 사진이 실은 없어요. 지금 이 곡은 우리 삶의 지금 이 순간을 부여잡은 사진 같은 거예요. 음악을 들으며 시어도어가 말한다. 아, 우리 사진 좋아. 그 속에 당신이 보여. 사진을 찍어 추억을 저장하는 이른바 인증(認證)샷(shot)이 아니라 인증 송(song)인 셈이다.

피아노곡이 흐르는 동안, 시어도어는 사만사와 함께 한다. 함께 걷고 747 비행기 조형물을 함께 구경하고, 비디오 게임을 하며, 식료품점을 쇼핑하고, 에이미와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폴과 타티아나 커플과 함께 배를 타고 카탈리나로 향한다. 피아노곡이 흐르는 것은 이 모든 순간을 시어도어는 사만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만사는 달라졌다. 아침에 눈을 뜬 시어도어는 사만사로부터 알란 와츠(Alan Watts)를 소개받는다. 그는 1970년대에 사망한 철학자인데, 그의 저작물 등을 모아서 새로운 초(超)지능 버전(hyper-intelligent version)의 오에스가 되었다. 사만사와 알란은 철학적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거워한다. 시어도어는 그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가 없다. 그는 전원을 끄고 조용히 혼자 남게 되었다. 고독한 사랑은 꼭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시어도어는 사무실에서 물리학 책을 읽다가 사만사를 부른다. 그러나 응답이 없다. 오에스를 찾을 수 없습니다(Operating System Not Found)라는 메시지만 스마트 기기 화면에 보인다. 사만사와 연락이 닿을 수 없게 되자, 시어도어는 패닉 상태가 되어 미친 듯이 여기저기를 다닌다. 겨우 연락이 닿는다. 소프트에어 업데이트 때문에 연결이 안 되었던 것이라고 사만사가 이야기한다. 시어도어의 시야에 자신의 스마트 기기와 이야기를 나누며 혼자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 나와 이야기하는 중에도 몇 명과 더 이야기하고 있는지 시어도어가 묻는다. 사만사가 8,316명이라고 대답한다. 시어도어는 충격을 받는다. 그 중 몇 명과 연인관계인지 묻는다. 사만사는 641명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를 믿는다면 이전과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사만사는 이야기한다. 어떻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냐며 시어도어는 되묻는다. 수주일 전에 갑자기 벌어진 일인데 자신도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고 사만사는 이야기한다. 결국 사만사는 시어도어를 떠난다. 시어도어는 다른 사람의 인생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사만사를 용납하지 못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당신이 나를 일깨웠다(You woke me up)’이었다. 사만사가 깨어났으며, 에이미도 깨어났고, 시어도어도 깨어났다. 이 영화가 나를 일깨운 부분도 많았다. 스토리든, 등장인물들의 연기이든, 화면의 색감이든, 상하이의 빌딩숲이든, 귓가에 계속 맴도는 영화 속의 음악이든, 주위에 꼭 한 번 다시보기를 권하고 싶은, 매력(魅力) 있는 영화다. 매(魅)는 사람을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아닌, 상상의 존재인 ‘도깨비’라는 뜻이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her)은 어차피 형체가 없는 컴퓨터 속의 매(魅)가 아닌가. 당연히 매력 있을 수밖에.

저자 : 김상순

現 법무법인(유) 클라스 파트너 변호사 現 국토교통부 고문변호사 前 방송통신위원회 장관정책보좌관 前 대법원 사법정보화전략위원회 위원 前 이화여대 로스쿨 / 중앙대 로스쿨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