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사회에서 신뢰의 미래를 고민하며
레이첼 보츠먼의 『신뢰 이동』을 읽고 이 글을 쓰는 시점은 한국의 20대 대선이 끝난 직후다. 복합적인 요인이 합쳐진 결과지만, 거대 양당 후보에 대한 진영 결집이 일어나 48.56% 대 47.83%라는 역대 최소 차이의 득표로 당락이 갈렸다. 대립과 갈등, 분열과 대결을 극복할 대통합의 리더십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지만, 그렇게 하겠노라는 약속이 공허하게 들렸다. 선거전을 치를 때 서로 편을 가르고 네거티브에 주력하던 모습들에서 환골탈태해 열성 지지자와 자신의 심복까지 버리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을 보여도 통합이 힘들 것 같은 현실 때문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 제도권 정치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한국인은 다른 누굴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세계가치관 조사(2017-2018)에서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비율은 33%로 3분의 1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 38%이던 비율이 2000년대 들어 27%까지 떨어졌다가 그나마 근간에 회복한 것이다. 나머지 3분의 2는 타인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의 타인 신뢰 비율이 70%대, 중국도 60%대인 것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고, 세계 전체적으로도 한국은 신뢰 중진국에 속한다. 다른 국내 조사에서 코로나 19 상황을 거치며 대인 신뢰 비율이 낮아졌다는 결과를 보면, 최근에 우리 사회의 신뢰가 개선됐을 것 같지는 않다.
정치인의 말은 더욱 믿지 않는다. 여의도에서 쌓은 경륜이 국민의 신뢰도와 비례하지 않고 구태와 청산의 표식이 되기도 한다. 정부 기관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국회가 늘 가장 낮았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원 경험이 없는 0선 30대 정치인이 당 대표자로 선출되고, 0선 8개월 정치신인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다. 유럽에서도 프랑스의 마크롱,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처럼 젊은 정치 신예가 이끄는 신생 정당이 정권을 잡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해 왔다.
『신뢰 이동』에서 보츠먼은 세상 사람들의 신뢰가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이동해왔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지역적 신뢰’로서 모두가 서로를 아는 지역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갖던 신뢰였다. 신뢰 대상으로 같은 마을 사람과 이방인이 구분되는 시대의 신뢰였다. 두 번째는 ‘제도적 신뢰’로서 조직화된 산업사회에서 신뢰가 계약, 법정, 상표 등으로 형태로 작동하는 일종의 제도적 중개인에 의한 신뢰다. 공공기관이나 제도권 언론에 대한 신뢰도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는 ‘분산적 신뢰’로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사회연결망서비스(SNS)의 확산으로 거래 및 중개 방식이 플랫폼으로 전환되고 1인 미디어 시대로 미디어 환경이 바뀌면서 등장한 분권화된 신뢰다. 이 분산적 신뢰는 기존의 제도적 신뢰의 대상이었던 금융기관, 정부, 언론 등에 대한 신뢰가 각종 스캔들이나 투명해진 사회 감시망으로 추락한 후에 부상하고 있다. 이제 공중파 TV 뉴스보다 SNS에서 지인들이 전해주는 뉴스나 유튜브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보츠먼이 단서를 달았듯이, 신뢰의 지배적인 양식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이전 양식이 완전히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신뢰의 미래를 고민하며 해결 방안을 모색할 때도 여전히 지역적 신뢰, 제도적 신뢰의 역할을 분산적 신뢰와 함께 고려해야 한다. 특히 한국은 압축 성장과 불균형 발전, 전쟁, 정변, 민주화, 외환위기 등 사회 급변의 역사를 가진 만큼 세대별로 신뢰의 대상과 경험이 매우 다르고, 지역 간의 차이도 있다.
먼저 지역적 신뢰는 직접적인 상호작용과 교환에 의해 형성되는 공동체의 사회자본인데, 한국 사회에서도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농촌 마을 사람들과의 협업 가치를 감소시킨 산업화와 도시화, 지역 기반의 친족 집단 해체와 핵가족화, 반상회 등 이웃과의 (반강제적) 교류 기회 소멸, 아파트 선호 일변도의 주거 양식 고착 등이 요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지역적 신뢰의 쇠락 정도가 한국 사회에 심하다는 점이다.
당신은 사생활이 엄격히 보장되지만, 이웃과의 소통과 교류는 힘든 폐쇄적인 주택지구 A와 이웃과의 소통과 교류가 쉬운 개방적인 환경이지만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는 주택지구 B 중 어느 곳에 살고 싶은가? 내가 2017년에 한국, 중국, 일본, 미국 4개국 대학생 각 1,000명 총 4,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1에 의하면, 주택지구 B를 선택한 비율은 미국 대학생은 46.9%인 데 비해 한국 대학생은 26.6%에 그쳤다.
지역적 신뢰의 기초가 되는 이웃과의 교류를 위한 첫걸음인 인사에 대한 의향은 어땠을까? 자신이 거주하는 고층 아파트 승강기를 탔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 타고 있었고 그가 평소 친분은 없는 같은 아파트 거주민일 때 먼저 인사를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응답 비율은 한국 대학생이 47.5%로 가장 높았다. 5점 척도 의향으로도 한국 2.73, 일본 3.16, 중국 3.28, 미국 3.57로 나타났다.
지역적 신뢰의 회복은 이제 물 건너간 것일까? 갑자기 어렵거나 힘든 상황이 생겼을 때 교류가 없었던 이웃에게 작은 도움도 청할 수 없는 현실은 공간적 각자도생과 고독사를 낳는다. 중장년층 중심으로 지역별 문화센터나 체육 동호회 등을 통해 지역 기반의 사회적 교류를 일부 이어가고 있지만, 상대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국한된다. 아플 때 도와주고, 돈이 필요할 때 빌려주고, 힘들 때 얘기 상대가 돼 줄 존재를 가진 비율도 소득과 학력에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나, 사회적 연결망 같은 사회 자본의 보유가 경제 자본 및 인적 자본과 동조화돼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역 기반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종교단체는 지역적 신뢰를 높이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국 대학생들은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보다 종교나 종교에 대한 태도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타협할 의향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 지도자가 통합적, 포용적, 화해적, 탈진영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견지하고 이를 사목에 실천하지 않으면, 종교 기반의 지역적 신뢰 증진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제도적 신뢰를 망가뜨려온 요인들도 많다. 기존 제도 내에서 상층부를 점하던 엘리트들의 치부와 위선이 드러날 때, 공적 신뢰의 마지막 보루 같았던 사법부마저 중립성과 공정성을 훼손했을 때,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내부정보를 이용해 사익을 취했을 때, 제도권 언론이 조회 수 경쟁을 벌이며 자극적 선동 기사와 빈껍데기 속보나 오보를 남발할 때, 제도권 이익단체들이 공익을 표방하며 기득권 수호나 강화를 위한 집단행동을 벌일 때 제도적 신뢰는 흔들린다.
앞으로 제도적 신뢰의 제고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어렵겠지만, 사회계약에 바탕을 둔 제도와 시간의 검증을 거친 시스템의 골격을 유지하는 한 노력해야 할 일이다. 보츠먼의 표현대로 제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거둬들이면 근거 없는 주장과 음모, 편견, 속임수가 난무하는 ‘신뢰 진공’이 생길 수 있다. 조직 이론에 의하면 조직 문화를 바꾸는 유력하고 유일한 길은 조직구성원들을 바꾸는 것이다. 탈권위화와 분권화가 대세를 이루어 특권과 지대를 노리는 사람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전문성과 공공심에 기반한 인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기관의 정보 공시가 늘어나고 모니터링이 용이해지면서 제도권 종사자와 중개인의 행동이 투명성의 압력으로 자정되는 것도 제도적 신뢰의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제도의 타락에 대한 대중적 의심과 함께 확산되고 있는 분산적 신뢰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민주화와 투명화가 각 영역에서 진전됐음에도 공중파 제도권 미디어의 국민적 영향력은 5공 시절 이른바 ‘땡전뉴스’(9시 시보와 함께 대통령의 홍보 동향부터 보도)보다 현격히 줄었다. 뉴스 시장에는 저비용으로 제작되는 정치평론 프로그램을 큰 자막과 큰 음량으로 하루에도 수차례 송출하는 채널들이 가세했다. 근간에는 가짜뉴스를 포함해 음해와 선동을 일삼는 유투버들이 자동재생 추천 알고리즘을 타고 사람들의 편견과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청년들의 인식에서도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끼리 내부적 결속이 강한 반면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결속형 사회’로 여겨지고 있다. 4개국 대학생 조사에서 결속형 사회와 ‘연계형 사회’(내부적 결속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다른 집단에 대해서도 개방적이고 연결된 사회)의 스펙트럼(0에 가까울수록 결속형, 10에 가까울수록 연계형)에서 자국 사회의 위치를 물어보니 한국은 3.61로 4점대의 일본, 5점대의 미국, 중국에 비해 “우리가 남이가?”식의 결속형에 가깝게 인식됐다.
여기에 분산적 신뢰의 확산 도구인 SNS와 개인 맞춤형 추천 알고리즘이 가세하면 세상은 더욱 분열되고, 분열된 집단 내에서 결집이 강화될 수 있다. 실제로 <세계가치관조사>에서 생계의 개인 책임을 중시하는 입장(보수)과 정부 역할을 지지하는 입장(진보)에 대한 스펙트럼에 있어 2010년에 비해 2017년에는 우리나라의 전체 연령층에서 보수화 경향이 발견되면서, 중도적 견해가 감소하고 보수와 진보 양쪽의 의견이 늘어난 진영 결집이 발생했다. 미국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치적 견해 스펙트럼이 2010년대 들어와 계속 멀어져 중간 영역의 겹침이 줄어들고 쌍봉형으로 진영 결집이 일어난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보츠먼은 분산적 신뢰가 갖는 가능성과 위험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플랫폼 기술과 평점 시스템으로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쌍방향으로 약속을 지키고 친절하게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신뢰의 도약에 분명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는 블록체인 기술이 산업과 금융에서 탈 중심화를 가속화하면서 제도적 신뢰 시스템의 각종 중개인 직업군을 대체해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분산적 신뢰의 도구와 그 재료인 각종 개인정보가 국가나 거대 플랫폼 기업에게 견제 없이 집중될 경우, 새로운 방식의 중앙집권과 기술적으로 세련되고 완벽해진 감시통제 체제가 등장할 위험도 있다.
그런데 작금의 분열된 우리 사회를 보고 있어서인지, 인간성과 윤리와 견제가 결여된 미래의 기술 디스토피아에 대한 보츠먼의 우려보다 저자의 마지막 당부가 크게 들어온다. 결론의 마지막 단락에 담긴 내용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을 자동으로 누르고 옆으로 넘기고 공유하고 수용하기 전에 잠시 차분히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판단에 도움이 되는 적절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다. 이 사람이나 정보나 대상이 신뢰할 만한가? 이들이 무엇을 하거나 전달할 거라고 신뢰하는가? 이런 과정을 거치는 사이,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나만의 소박한 방식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키 하나만 누르면 누구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사회의 가장 소중하고 연약한 자산인 신뢰를 지키는 데 일조할 수 있다.”
- 김희삼, 《사회자본에 대한 교육의 역할과 정책방향》, KDI 연구보고서, 201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