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온라인 혐오 극복과 자율규제의 중요성

한국사회에 넘쳐나는 혐오에 대한 사회학적 진단

한국사회는 언제부터인가 혐오가 일상화된 사회로 변해버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형성된 경쟁적 질서는 한국 사회를 깊게 관통했고,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동체성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서로를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자로 인식하게 되면서, 한국인은 타인과 거리를 두는 방식의 삶에 익숙해져 갔다. 한편 지난 10년 동안 이러한 거리두기는 단순한 타인의 회피 수준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조직적·감정적 혐오로 변질되어 왔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 정치적 지지층이 다른 사람들, 다른 세대와 성별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하는 현상이 전 사회 영역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혐오는 익명성에 기초한 온라인 공간에서 생성되고 증폭된다. 익명성이 보장된 플랫폼은 개인을 감정적 책임으로부터 분리시키며, 평소 억제되던 공격성과 분노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온라인의 혐오는 오프라인으로 이동하며 현실관계에 까지 악영향을 미친다. 혐오를 경험한 개인은 다시 혐오로 응수하고, 이러한 악순환은 더 큰 감정적 적대와 사회적 단절을 낳는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갈등, 분열, 정치·세대·성별 대립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온라인 혐오의 확장에서 비롯된다.

혐오를 키운 책임의 상당 부분은 사회구조에 있다. 교육과정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을 ‘제쳐야 할 경쟁자’로 규정하도록 해온 사회적 환경은 개인을 타자에 대한 무한경쟁 속에 방치해두었다.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한국 사회의 기본 질서가 된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타인은 협력의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이 되었고, 나와 세계관·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은 곧바로 ‘방해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하며 군중심리 속에서 혐오를 조직적으로 표현한다. 내집단 편향과 외집단 배척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한국사회를 뒤르껭이 말한 ‘아노미(anomie)’ 상태로 밀어 넣는다. 아노미는 사회규범이 약화되고 공동체적 연대가 붕괴된 상태를 의미한다. 맹목적 혐오가 확산되면 개인은 오직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가치만을 절대화하며, 다른 집단의 주장이나 삶의 방식은 무조건 틀렸다고 믿는다. 이때 사회는 공통의 규범을 잃고, 상호 신뢰의 기반이 사라지며, 사회적 통합은 급속도로 무너진다. 한나 아렌트가 경고했던 ‘악의 평범성’은 한국사회에서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를 향한 배제와 혐오가 특별한 악의가 아니라 일상적 감정의 언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혐오는 단순한 개인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갈등을 증폭시키며 정치적 양극화를 강화하고, 공동체적 신뢰를 파괴하며, 경제적 협력 구조까지 흔들어 놓는다. 이는 21세기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본질적 과제이다. 혐오의 순환을 멈추기 위해서는 경쟁만을 강조해 온 사회구조의 재검토가 필요하며, 다양한 가치와 정체성을 포용하는 민주적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 절박하다. 혐오의 시대를 끝내지 못한다면, 한국사회는 더 깊은 단절과 극단적 대립 속에서 지속적인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혐오사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향하여

사실 그 누구도 혐오의 표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과 감정을 동시에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순간적 분노, 불안, 상처의 경험 속에서 개인은 타인을 향해 혐오적 언어를 언제든지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바탕으로 성립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감정표현은 개인의 권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표현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줄 정도의 표현일 때 어떻게 대응하는가이다.

혐오표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은 정부가 강력한 규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사회에서는 그 위험성이 더욱 크다. 어느 정부든 혐오 규제를 명분으로 특정 진영의 표현을 더 강하게 제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불가피하게 공정성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규제 대상이 되는 집단은 “정부가 우리 편을 침묵시키려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고, 결국 또 다른 형태의 혐오와 정치적 분열이 촉발된다. 이러한 규제는 혐오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감정적 대립과 피해의식을 강화하여 혐오를 증폭시킬 위험성이 크다.

둘째로, 개인의 표현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개입은 감시사회의 형성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정부가 개인의 표현을 일일이 감시·통제하게 되면, 개인은 당연히 자신을 객체화하여 압박감을 느낀 상태에서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미셸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이 일상화되면, 국가는 시민의 생활 전반을 감시하는 존재로 비대화되고, 민주주의의 핵심 전제인 개인의 인권과 자유는 급격히 약화된다. 이러한 이유로 헌법재판소는 이미 인터넷 실명제를 위헌으로 판단하며, 표현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이 민주주의 질서를 훼손할 수 있음을 명확히 경고한 바 있다.

따라서 혐오 문제의 해결은 단순히 규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뒤르껭이 강조했듯, 사회는 강압적 통제보다 규범의 내면화를 통해 건강하게 통합되기 때문이다. 시민이 스스로 혐오의 위험성을 이해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 때, 사회 전체의 규범이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즉, 혐오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강압적 통제도, 일방적 규제도 아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문화, 표현의 자유와 책임을 조화시키는 민주적 규범, 감정의 폭발을 혐오가 아니라 대화로 전환시키는 사회적 문화가 필요하다. 혐오의 시대를 끝내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해답은 결국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해야 할 시민적 감수성과 민주적 상호존중의 문화이다.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자율규제의 필요성

혐오가 일상화된 한국사회에서 그 해결책은 개인 스스로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며 자신의 표현을 조심하는 것, 즉 자율규제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순간적으로 타인을 상처 주는 표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을 성찰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표현을 들었을 때 기분이 상한다면, 동일한 표현을 듣는 타인 역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서 자율규제는 출발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지만, 타인을 향한 배려 역시 공동체가 작동하는 기본 조건이다.

이러한 개인의 인식 전환은 결국 공동체적 통합을 다시 가능하게 한다. 통합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서로를 배려할 때, 그 배려는 존중을 생산하고 존중은 다시 연대감을 형성한다. 이는 뒤르껭이 말한 ‘도덕적 연대(moral solidarity)’의 작용이며, 아노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핵심 조건이다. 뒤르껭은 아노미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의례(ritual)’에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형식적인 의식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공유되는 규범적 실천을 의미한다.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면서 표현을 조심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의례’가 될 때, 사회는 규범적 안정성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의 의례는 한국 민주주의가 잃어버린 신뢰와 결속을 되찾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를 중심으로 여러 위원회 전문가들이 카카오·네이버 등 주요 포털과 협력하며 혐오표현을 줄이기 위한 자율규제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포털 사업자들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혐오표현을 감지하고, 전문가들은 표현의 맥락·의도·사회적 함의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포털에 조치 내용을 전달한다. 이는 단순한 금지나 감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회적 책임을 촉진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미 중요한 성과를 내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자율규제 모델을 발전시키는 것이 혐오표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이며 민주주의적 방식이 될 것이다.

다만 큰 과제가 하나 남아 있다. 바로 ‘유튜브’의 문제다. 현재 혐오표현의 확산지가 되고 있는 유튜브는 국내 포털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 자율규제 체계가 작동하기 어렵다. 국가 규제를 가하는 방식 역시 국내 포털이 아니기 때문에 큰 한계를 갖는다. 결국 해결책은 다시 자율규제로 돌아온다. 결국 혐오사회를 극복하는 길은 거창한 정책이나 권력의 개입이 아니라,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천하는 작은 자율규제에 달려 있다.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는 표현, 상대를 향한 최소한의 존중, 공동체를 위한 책임 있는 표현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신뢰를 다시 세우고, 무너진 연대의 토대를 복원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해법이다.

[참고문헌]

Durkheim, É. (1897). Le Suicide: Étude de sociologie. Paris: Félix Alcan.

Foucault, M. (1961).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Paris: Plon.

저자 : 최항섭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한국정보사회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