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기술, 사유하는 인간
우리는 정보통신기술과 관련 산업의 급격한 발전이나 팽창이 우리의 생활 세계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을 이미 직‧간접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최근 부상하는 새롭거나 낯선 정보통신기술 용어들은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의 당업자들에게까지 적잖은 혼란과 불안을 초래하고 있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자는 “쉴 새 없이 낯선 정보기술 용어가 등장하고 집단별‧세대별로 새로운 문화적‧경제적 흐름이 생겨나는” 세계를 “디지털 세상”으로 파악한 후, 이러한 “디지털 세상의 현재 모습과 미래 방향을 보여주는 100개의 열쇳말”을 가지고 인간이 잘살기 위해 성찰할만한 주제나 문제점 등을 환기하고 있다.
부연하면, 이 책은 인간과 정보통신기술 그 자체 또는 이를 활용한 제품이나 서비스, 그리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문화 현상 간 상호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한편, 이들을 둘러싸고 파생되는 문제점을 제기하거나 그 해결방안에 관한 실마리의 탐색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호는 ≪디지털 개념어 사전≫이지만, 사전적 의미에 있어 사전의 통상적 역할을 넘어 인간에 관한 사유를 요청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끌 만한 부분이다. 물론, 제호만으로 유입된 독자에게 있어서는 다소 당혹스러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저자의 서문에 있는 입장-“디지털 기술을 키워드로 삼았지만 관심은 언제나 ‘그러한 강력하고 편리한 도구로 인해 나의 삶과 사회적 관계는 어떠한 변화에 직면하게 될까’라는 인문학적 고민으로 이어졌습니다.”-을 통해, 이 책의 지향점을 어렵지 않게 포착해 낼 수 있어 전술한 우려가 발생할 여지는 극히 적을 것 같다.
요컨대, 이 책은 일차적으로 정보통신기술이나 시사용어 등에 관한 설명을 통해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혼란이나 불안을 다소나마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책의 보다 핵심적 부분 내지 역할은 정보통신기술이나 서비스 혹은 사회현상 등으로 인한 인간 내면에 관한 성찰의 필요성, 인간에게 있어서의 이익과 손해,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문제 및 인간과 기계(또는 시스템) 간의 관계 문제의 제기에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에 관한 물음이다. 즉, 이른바 격변하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점진적 인간에 대한 오래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주지된 바와 같이, 인간과 기술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비단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물음에 있어 인간을 중심에 둬야 한다는 접근 방식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일례로, 기술 변화가 인간적 차원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연구자 중 하나가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1934년 저작인 ≪기술과 문명(Technics and Civilization)≫에서도 그러한 통찰1을 찾아 볼 수 있다.
나아가, 다니엘 R. 헤드릭(Daniel R. Headrick)이 산업혁명(1760-1830) 당시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대해 설명한 내용-“모든 기술 혁신처럼 산업혁명의 기술 혁신 역시 인간이 자연을 더 잘 지배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가져온 변화는 이전의 기술 변화에 비해 훨씬 더 빠르고 파괴적이었다.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산업화된 국가의 국민들은 상품을 싸고 빠르게 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전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됐으며, 장거리도 순식간에 통신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화는 기술이 소수에게 집중돼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안겨줬다.2”-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정보통신기술 또한 산업혁명의 기술의 노정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강유원 박사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우리가 급변하는 피상적 현상이 아닌 본질적 구조와 문제에 천착해야 함을 알려준다. “이른바 ‘디지털 시대’에는 더 이상 노동생산물이 노동자에게 맞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이 이루어져 있고, 새로운 종류의 노동이 등장하고 있다는 궤변이 더러 있다.” “이런 주장은 이른바 ‘정보화 사회’라는 말이 나돌면서 더욱 그럴싸한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무리 겉모습이 달라도 그것이 생산되는 과정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본질은 다르지 않다.” “‘디지털 시대’에 새롭게 등장했다고 하는 계급으로 소위 ‘가상계급’이라는 게 있”는데, “이러한 판단에는 사이버스페이스가 현실 공간과 전혀 다른 곳이라고 하는 착각이 전제돼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 공간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며, 거기에는 별도의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국의 미디어 연구자 바브룩은 가상계급이란 결국 기존 자본가 집단과 신종 테크노 엘리트가 결합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두 집단은 서로 정책적으로 연합하면서 20세기 말의 하드웨어 산업을 지배하고 더 나아가 소프트웨어 문화까지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상계급이란 한마디로 자본가일 뿐이다. 이들은 고도로 집약된 기술을 이용해서 자본의 증식을 가속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소모된다. 자본의 자기증식을 성취하는 방식이 약간 바뀌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중시되는 요소가 과거에는 일종의 ‘힘’이었다면, 현대는 기술이라는 것이 달라졌을 뿐, 과정 자체의 메커니즘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3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날의 급변하는 기술과 세상을 온전히 따라잡아 이해한 후 적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고된 일이며, 나아가 미래에 어떠한 기술이 부상해 세상이 어느 방향으로 급변할지를 예측해 미리 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으로서 ‘좋은 삶(eu zēn)’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더욱 모를 일이다. 여전히 유효한 거대 자본력에 의해 나타나는 격변하는 기술과 쏟아지는 정보들 속에서 그나마 현혹되는 정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저 부지런하고 해박한 자들의 현상에 대한 설명과 통합적 사유를 요구하는 고전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사유하는 것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기계 자체는 인간의 상상력과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문명을 새롭게 혁신하는 것은 기계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그 다음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를 파악해야 한다. 기술의 세계는 결코 고립되고 자기 충족적 세계가 아니다. 이는 분명 다른 환경이 주는 충격으로 인한 힘과 자극에 반응한다.”(루이스 멈퍼드 지음, 문종만 옮김(2013), 『기술과 문명』, 책세상, 27면). [본문으로]
- 다니엘 R. 헤드릭 지음, 김영태 옮김(2016), 『테크놀로지-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다른세상, 185면 참조. [본문으로]
- 강유원(2001), 『책』, 야간비행, 194-195면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