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의 주요 내용과 시사점

Ⅰ. 서론
2022년 11월 ChatGPT의 공개로 촉발된 글로벌 인공지능 경쟁은 2025년 3월 현재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강(兩强)을 유럽연합(EU), 일본, 한국 등이 뒤쫓는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EU는 디지털 제품과 서비스가 EU 역내에서 국경을 넘어 원활하게 거래될 수 있는 ‘디지털 단일 시장’(digital single market)의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나, 정작 디지털 단일 시장에서 이윤을 창출할 만한 경쟁력을 가진 ‘EU 토종 기업’이 없다는 모순(矛盾)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타개하기 위해 EU가 채택한 정책 수단 중 하나가 다름 아닌 ‘규제 강화’이다. 2010년대 후반 이후 EU가 제정한 일련의 규범들은 – 예컨대 개인정보보호법(GDPR), 디지털 시장법(Digital Markets Act), 디지털 서비스법(Digital Service Act), 인공지능법(AI Act) 등 –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EU 역외(域外)에 기반을 둔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의 EU 시장내 활동을 규제함으로써 EU 기업을 보호하겠다는 함의(含意)를 담고 있다는 점에 학계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이 중 최근 가장 주목받는 것은 2024년 8월 발효되어 2025년 2월 2일부터 순차 시행 중인 인공지능법(이하 ‘EU인공지능법’)으로 보인다.1
이미 국내에 많이 알려졌듯이2 EU인공지능법의 핵심은 AI를 위험(risk)에 따라 허용할 수 없는 위험, 고위험, 제한된 위험으로 분류하고 AI의 공급자(provider) 및 이용자(deployer)에게 분류 결과에 따라 서로 다른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다.3 즉 EU인공지능법은 전형적인 규제법, 공법(公法)이다. 전세계 최초로 시행되는 AI법으로 알려진 EU인공지능법은 최근 제정되어 2026년 1월 22일 시행을 앞둔 우리의 ‘인공지능기본법’에도4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5 그런데 AI를 이용하는 평균적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규제당국이 AI를 어떻게 규제하는지보다는 AI를 이용하다가 사고(incident)가 발생한 경우(이하 ‘AI 사고’) 법적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즉 누가 AI 사고에 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며 손해배상범위는 어떻게 되는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정작 EU인공지능법은 이에 관하여는 아무런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EU는 AI 규제에만 치중할 뿐 정작 AI 사고의 법적 규율에 관하여는 방치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AI 사고의 손해배상책임은 기본적으로 사법(私法)의 영역이므로 공법인 EU인공지능법에 관련 규정을 두는 것은 법체계상 다소 어색하며 다른 법률에서 규율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AI 사고에 관한 EU의 규범적 접근 방식 또한 이와 같이 EU인공지능법이 아닌 별도의 입법을 통하여 해결하는 것이다. EU는 EU인공지능법 제정이 논의되기 이전인 2019년경부터 이미 AI 사고 관련 법제도 정비를 추진해 왔다. 그 중 2025년 3월 기준으로 추진 단계를 넘어 실제로 입법이 완료된 것이 바로 2024년 11월 18일 발효된6 EU의 제조물책임지침(Product Liability Directive. 이하 개정 전 지침과 구별하기 위하여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이다.7 즉 EU인공지능법과 마찬가지로 개정 제조물지침은 AI 사고에 관하여 제조물책임을 적용하는 세계 최초의 입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 글은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의 주요 내용 및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특히 국내 인공지능 산업에 시사하는 점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8
Ⅱ.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의 제안 배경
사법(私法)의 관점에서 사고를 다루는 기본 법리는 고의나 과실과 같은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사고를 발생시킨 자가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것이다(‘과실책임’).9 EU는 기본적으로 과실책임법리는 AI 사고에서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으며, 오랫동안 법리가 축적되어 왔고 안정적으로 적용되어 온 기존의 민사책임 법리를 AI 사고라는 이유로 전면적으로 흔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다만 EU의 특성상 회원국별로 책임 법제에 차이가 있는 점, 그리고 AI의 자율성이나 불투명성, 복잡성 등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운 점10 등을 감안하여 AI 사고에 적용되는 EU 차원의 통일적인 책임 규범을 제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AI 사고의 피해자’와 ‘非-AI 사고의 피해자’가 적어도 민사상 손해배상의 측면에서는 동일한 수준의 법적 보호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 EU의 기본 입장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EU 기본 입장이 제조물책임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제조물책임은 제조물(product)의 제조업자(provider) 등이 해당 제품의 결함(defect)으로 인하여 발생한 신체 및 재산상 손해를 배상토록 하는 책임법리이다. EU는 1985년 제조물책임지침을 제정, 시행해 왔는데, 제정 당시 상정한 제조물의 개념은 말 그대로 산업화 시대에서 대량 생산, 유통되는 유체물로서의 상품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조물 개념은 1985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촉발된 정보기술혁명과 그로 인한 경제사회 변화를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오늘날 시장에서 출시, 유통되는 상품의 상당수는 소프트웨어, 디지털, AI 등과 같은 무체물로서 전통적인 제조물 개념에 포섭되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EU는 소프트웨어 등과 같은 ‘새로운 상품’의 결함으로 발생한 손해에 관하여도 제조물책임을 적용하여 소비자를 두텁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2022년 9월 28일 제조물지침 개정안을 제안했다. 개정안은 약 2년간 논의를 거쳐 2024년 10월 23일 EU 의회를 통과하여 2024년 11월 18일 발효됐다.
Ⅲ.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의 주요 내용
1. 물적(物的) 적용 범위: 소프트웨어, AI, 서비스 등으로 확장
가. 소프트웨어
개정 제조물책임지침과 구 지침의 가장 큰 차이는 ‘소프트웨어(software)’를 제조물 개념에 포함했다는 점에 있다[제4조 (1)].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에 의하면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같은 유체물에 저장돼 유통되는지, 인터넷 등 네트워크를 통해 다운로드하는 방식으로 유통되는지, 아니면 클라우드 서비스나 생성형 AI 서비스와 같이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서버에 접속하여 서비스 형태로 제공되는지(Software-as-service, ‘SaaS’) 등 그 공급, 유통, 사용 방식과 무관하게 모두 제조물에 해당한다(개정이유 제13조). 따라서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이 시행되면 EU 역내의 소비자는 소프트웨어의 결함으로 발생한 손해에 관하여 소프트웨어 제조업자 등에게11 제조물책임을 물을 수 있다.
나. AI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소프트웨어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지는 않으나, 개정이유(recital)를 살펴보면 운영체제(OS)나 응용프로그램(application)뿐 아니라 AI 시스템(AI system)을 소프트웨어의 예시로 언급하고 있다(개정이유 제13조). AI 시스템의 개념은 EU인공지능법에서 “자율성과 배포 후 적응성을 갖도록 설계된 기계 기반 시스템으로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예측, 콘텐츠, 추천, 결정 등의 결과물의 생성 방식을 입력데이터로부터 추론하는 시스템”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에서 출시, 유통되고 있는 AI의 상당수는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상 소프트웨어로서 제조물에 해당한다.
다. 서비스
경제학에서 재화는 형태가 있는 물건, 용역은 형태가 없는 서비스를 의미하며 양자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에서도 서비스 자체는 제조물로 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개정이유 제17조). 그러나 디지털 서비스 중에서 제조물과 통합되거나 상호 연결돼 있어 해당 서비스가 없으면 제품이 하나 이상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경우 그러한 디지털 서비스는 개정 제조물지침상 관련 서비스(related service)로서 제조물의 구성요소(component)에 해당한다[제4조 (3)]. 구성요소(y)의 제조업자(B)는 해당 구성요소를 통합하거나 상호연결하여 제조물(x)을 만든 제조업자(A)의 통제하에 있는 경우에 구성요소(y)의 결함이 제조물(x)의 결함으로 이어져 손해를 발생시키면 제조업자와 연대하여 제조물책임을 지게 된다(A, B의 연대책임; 제8조 1.).12 요컨대 서비스라 하더라도 제조물의 관련 서비스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이 적용된다.
라.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오픈 소스(open source)란 일반적으로 “저작권이 존재하지만, 저작권자가 소스 코드를 공개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 복제, 배포, 수정,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정의된다.13 오픈 소스는 말 그대로 그 용어 및 개념의 본질상 ‘소스 코드’ 형태로 ‘공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붙특정 다수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집단 지성을 통하여 개발된다는 특징이 있다. 오늘날 상용 소프트웨어의 상당수는 오픈 소스(open source)에 터잡아 개발되고 있다.14 그렇다면 오픈 소스도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상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지, 바꾸어 말하면 오픈 소스 개발에 참여하는 자들도 해당 소프트웨어의 제조업자(provider) 등에 해당하여 제조물책임을 지게 되는가?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상업 활동(commercial activity)의 범위 밖에서 개발되거나 공급되는 무료(free) 오픈 소스는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제2조 2.). 제조물책임의 적용 대상을 오픈 소스까지 확대할 경우 오픈 소스가 촉발하는 연구개발 촉진과 혁신 창출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개정이유 제14조, 제15조). 다만 ‘상업 활동’의 범위에서 개발, 공급된 오픈 소스는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의 적용 대상이 된다. 여기서 ‘상업 활동’은 ‘사업’ 맥락에서 재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상업 활동 여부는 재화 공급의 정기성, 재화의 특성, 공급자의 의도 등을 고려하여 구체적 사안별로 판단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리성, 계속성, 반복성을 가진 재화 공급 행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 시적(時的) 적용 범위: 2026. 12. 9. 이후 EU 시장에 출시 또는 사용 개시된 소프트웨어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2026. 12. 9. 시행 예정으로, 위 날 이후 EU 시장에 ① ‘출시’(placing on the market) 혹은 ② ‘사용 개시’(putting into service)된 제조물에 적용된다(제2조 1.). 2026. 12. 9. 이전에 출시되거나 사용 개시된 제조물에는 구 지침이 적용되는데(제21조), 소프트웨어는 구 지침상 제조물이 아니므로, 2026. 12. 9. 이전에 시장 출시되거나 사용 개시된 소프트웨어에 관하여는 제조물책임을 논할 필요가 없다. 출시와 사용 개시의 개념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출시’가 제조물이 EU 시장에서 최초로 ‘유통’되는 시점에 방점을 둔 개념이라면, ‘사용 개시’는 제조물이 EU에서(EU 시장이 아님에 유의) 최초로 ‘사용’되는 시점에 방점을 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3. 인적(人的) 적용 범위: 손해배상책임 주체 확대
가. 손해배상청구권자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결함있는 제조물의 제조업자 등에게 제조물책임을 청구할 수 있는 자를 소비자(consumer)로 명확하게 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법인을 손해배상청구권자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하고 있으며(제1조, 제5조, 개정이유 제22조), 동 지침에 따라 배상받을 수 있는 손해의 개념에서 전문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재산 및 데이터에 발생한 손해 또한 제외된다(제6조 1.).15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동 지침상 손해배상청구권자는 사실상 소비자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나. 손해배상책임자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손해배상책임의 주체를 제조물의 제조업자에서 ‘경제적 운영자’(economical operator)로 확대했다(제8조). 경제적 운영자는 제조물이나 그 제조물의 구성요소의 제조업자(provider), 관련 서비스 제공자, 공인 대리인(authorised representative), 수입업자(importer), 풀필먼트 서비스 제공자(fulfillment service provider),16 유통업자(distributor)17 를 말한다[제4조 (15)].
제조물(x)에 결함이 있어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에 따른 손해가 발생한 경우, 제조물책임을 지는 자는 ① x의 제조업자(A), ② x의 구성요소(y)가 A의 통제하에 있는 x에 통합되거나 상호 연결되어 x에 결함이 발생한 경우 y의 제조업자(B), ③ A가 EU 역외에 위치한 경우 A와 연대하여 수입업자(C), 공인 대리인(D) 또는 풀필먼트 서비스 제공자(E)이다(단, E가 제조물책임을 지는 경우는 EU 역내에 C나 D가 없는 경우로 한정된다. 제8조 1.). ①, ②, ③의 책임은 연대책임이다. 한편 ④ x의 유통업자(F)는 피해자가 F에게 ‘EU 역내에 설립된 경제적 운영자’나 ‘x를 공급한 자체 유통업자’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고 F가 해당 요청을 접수한 후 1개월 내에 이들을 확인해주지 못한 경우에 한하여 제조물책임을 진다(제8조 3.).
마지막으로 ⑤ 온라인 플랫폼(G)은 경제적 운영자에 포함되지 않지만, G가 소비자에게 원격 계약 체결을 허용하고 그 계약에서 G가 상품을 제시하거나 특정 거래를 촉진하는 방식이 평균적인 소비자로 하여금 해당 상품이 G 자체 또는 G의 통제하에 있는 상인에 의해 공급된다고 믿게 만든다면 위 ④에서 언급한 유통업자로 취급돼 제조물책임을 부담할 수 있다(제8조 4., 3,, 개정이유 제38조).
4. 제조물책임 성립의 증명: 소비자의 증명 부담 완화
가. 결함 판단 기준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개인이 기대할 수 있거나 EU 규범 또는 EU 회원국의 국내법에 규정돼 있는 안전 수준을 준수하지 못할 경우 해당 제조물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제7조 1.). 2023년 5월 EU에서 ‘제조물안전규범’이 통과되어 EU 역내에서 유통되는 제품에 관한 안전 규정이 강회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위 규정은 결함 판단에 있어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18 또한 구 지침과 달리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에서는 결함 여부를 판단할 때 제조물이 시장에 출시되거나 운용을 개시한 시점 이후에도 계속 학습하거나 새로운 기능을 획득하는 능력을 가진 경우 그 능력이 제조물 자체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한다[제7조 2. (c)]. 이는 소프트웨어, 특히 AI와 같은 구 지침상 제조물이 아닌 ‘새로운 제조물’의 결함 판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나. 증명 부담 완화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에 의하더라도 피해자가 경제적 운영자에게 제조물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제조물의 결함, 손해 발생,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모두 증명해야 한다(제10조 1.). 그러나 동 지침은 피해자가 제조물책임소송을 제기한 경우 피고에게 관련 증거를 공개할 것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고(제9조 1.),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공개명령을 하였으나 피고가 이행하지 않은 경우에는 결함이 추정되도록 규정하고 있다[제10조 2. (a)].
또한 동 지침은 제조물에 결함이 있고 손해가 그 결함으로 ‘전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원고가 증명하면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추정되고(제10조 3.), 법원은 ① 제9조에 따라 피고가 증거를 공개하였고 ② 원고가 기술적 또는 과학적 복잡성으로 인하여 결함 또는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의 증명에 과도한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원고가 결함의 가능성 또는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의 가능성을 증명한 경우 결함 또는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제10조 4.). 즉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구 지침과 비교하여 결함 및 인과관계에 관한 피해자의 증명 부담을 상당 부분 완화하고 있다.
5. 역외 적용: 우리나라 기업에도 적용 가능
Ⅲ.1.에서 언급하였듯이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EU 시장에 출시하거나 EU에서 사용 개시된 제조물의 결함으로 발생한 손해에 적용되므로, 동 지침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자가 EU 역내에 위치한 자연인이라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 그렇다면 결함있는 제조물의 ‘경제적 운영자’가 EU 역외에 위치한 경우, 예컨대 우리나라 기업(B)이 EU 시장에 AI를 출시하였는데 그 AI에 결함이 있어 EU 시민(A)에게 손해가 발생한 경우, B가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에 따른 제조물책임을 지게 되는가?
사실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EU인공지능법이나 디지털시장법 등과 달리 역외 적용에 관한 명문의 규정이 없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것이, EU인공지능법이나 디지털시장법 등은 공법이므로 역외 적용 규정을 명시하지 않으면 EU 당국의 주권(행정권)이 EU 역외 기업에 미칠 수 있는지 논란이 될 수 있지만,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사법이므로 주권 침해 논란 등은 특별히 발생하지 않으며 국제사법(private international law)의 일반 원칙, 법리 및 이를 구체화한 각국의 개별 법률(우리의 경우 국제사법, EU의 경우 Rome I, II 조약 등)에 따라 역외 적용 여부를 판단하면 충분하므로 관련 규정을 별도로 둘 필요가 없다.
위 사례에서 B에게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이 적용되는지는 국제사법의 법리에 따른 국제재판관할권과 준거법 결정의 문제로서 일률적으로 단언하기 어려우며 그 자체로 별도의 연구 주제이지만,19 개략적으로만 언급해보자면 A가 EU 회원국 소재 법원에 B를 피고로 하여 제조물책임소송을 제기한다면20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이 준거법으로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Rome II 제5조), A가 우리나라 법원에 B를 상대로 제조물책임소송을 제기한 경우에도 최소한 A는 동 지침과 우리나라 제조물책임법 중 하나를 준거법으로 선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이 제조물 개념이나 증명책임 분배 등에서 A에게 유리하므로 동 지침을 선택할 것이다),21 결국 기본적으로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EU 역외 기업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Ⅳ. 시사점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세계 최초로 제조물 개념에 소프트웨어를 포함시키고 결함 또는 인과관계를 추정하여 피해자의 증명 부담을 완화하는 등의 새로운 내용을 규정하고 있어 상당한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굳이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GDPR이나 EU인공지능법이 우리 법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전례에 비추어 볼 때 동 지침과 유사하게 우리 제조물책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논의도 촉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현실이나 입법 절차의 복잡성 등을 생각해보면 과연 우리의 제조물책임법이 소프트웨어를 제조물에 포함시키는 등 동 지침과 유사한 내용으로 실제 개정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 설령 개정이 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EU 입장에서도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말 그대로 ‘지침’이므로 EU 회원국이 개별 법률로 입법해야만 실제로 구속력있는 규범으로 작동할 수 있다. 동 지침은 그 입법 시한을 2026. 12. 9.로 못박았지만(제22조 제1항), 과연 위 날까지 개별 입법이 완료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은 EU 역외에 위치한 기업에도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이므로 EU 시장에 소프트웨어나 AI 등을 출시하려는 우리 기업은 시행일인 2026. 12. 9.가 도래하기 전부터 미리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특히 EU가 AI 사고에 관한 책임법제로서 제조물책임과는 별도로 제정을 추진해 온 ‘인공지능책임법안’을 2025. 2. 12. 전격 폐기한 점에 주목한다면,23 향후 AI 사고에 관하여 EU가 동 지침을 적극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몇 가지 대응 방안을 두서없이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2026. 12. 9. 이전에 AI 등을 출시하여 아예 동 지침을 적용받지 않는 방법이 있다. 위 날 이후 AI 등을 출시한다면 동 지침 제9조 제1항에 따라 피해자가 제조물책임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후 관련 증거 공개를 청구할 수 있고 이에 불응한다면 결함이 추정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증거(예를 들어 AI 동작 로그 등)를 사전에 축적,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 EU인공지능법이 시행되면 국내 기업이라 하더라도 EU 시장에 AI를 출시하면 EU인공지능법에 따른 각종 안전 조치를 준수하여야 하는데(예컨대 고위험 AI의 경우 위험 관리 체계 구축 및 운영, 기술문서 작성, 로그 기록 보관 등) 이를 위반하면 EU인공지능법 위반에 따른 공법상 책임을 부담하는 것은 물론 동 지침상 결함이 추정되어 제조물책임을 부담할 위험이 커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제7조 1.).
- EU인공지능법은 2024년 8월 1일 발효되었고 2025년 2월 2일부터 순차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으며 2027년 8월 2일에 전부 시행될 예정이다. EU인공지능법 제113조. [본문으로]
- 예컨대 최경진 외 7인, “EU 인공지능법”, 박영사(2024). [본문으로]
- 이를 ‘위험 기반 접근법’(risk-based approach)이라 한다. 참고로 EU인공지능법은 위험(risk)을 “피해(harm)의 발생 확률 및 그 정도의 조합(combination)”으로 정의한다. [본문으로]
- 공식 명칭은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다. 2025년 1월 21일 제정되었고 2026년 1월 22일 시행 예정이다. [본문으로]
- 일례로 EU인공지능법과 유사하게 우리 인공지능기본법은 사람의 생명, 신체의 안전 및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AI를 ‘고영향 인공지능’으로 분류하고 고영향 인공지능 사업자에게 투명성 의무, 안전성 의무 등을 지우고 있다(제31조 내지 제35조). [본문으로]
- 후술하듯이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의 실제 적용일은 2026. 12. 9.이다. [본문으로]
- EU인공지능법은 그 형식이 규정(regulation)으로 EU 회원국의 개별 입법이 없더라도 바로 EU 역내에서 법률로서 작용한다. 반면 개정 제조물지침은 그 형식이 지침(directive)이므로 직접 법률로 작용할 수 없고 EU 회원국의 개별 입법이 필요하다. [본문으로]
-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의 상세한 내용은 김윤명, “EU 제조물책임지침 개정안의 주요 내용과 시사점”, 경희법학 제57권 제4호(2022. 12.), 113-129쪽; 박신욱, “유럽연합 제조물책임지침 개정으로부터의 시사”, 민사법학 제109호(2024. 12.), 300-307쪽 등 참조. [본문으로]
- 예컨대 우리 민법 제750조, 독일 민법(BGB) 제823조 등. [본문으로]
- 과실책임법리에 의하면 사고가 발생한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법한 행위, 가해자의 고의 또는 과실, 손해발생사실을 모두 증명해야 한다. [본문으로]
- 인적 적용 범위에 관하여는 Ⅲ.3. 참조. [본문으로]
- 단 동 지침 제11조 1. (f)에 해당하는 경우 구성요소 제조업자는 면책될 수 있다. [본문으로]
-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오픈소스SW 라이선스 가이드”, 2023. 2., 2쪽. [본문으로]
- 일례로 2021년 국내 기업 중 오픈소스를 활용한 비율은 61.5%이며, 특히 SW기업에서 상품에 오픈소스를 활용한 비율이 54.2%에 달한다. 각주 14, 15-16쪽. [본문으로]
- 단 개정 제조물책임지침의 적용이 배제되는 손해에 관하여 ‘재산’인 경우에는 ‘전적으로’ 전문적 목적으로 사용될 것을 요구하나, 데이터의 경우에는 ‘전적으로’라는 요건이 없다. [본문으로]
- 풀밀먼트 서비스 제공자란 해당 제조물을 소유하지 않고 창고업, 포장업, 주소 지정 및 발송업 중 2가지 이상을 상업적으로 제공하는 자연인 또는 법인을 말한다. 소위 ‘종합물류배송업자’라고 할 수 있다(개정 제조물책임지침 제4조 제13항). [본문으로]
- 유통업자는 제품의 제조업자 또는 수입업자가 아닌 자로서 제조물을 시장에 출시한 모든 자연인 또는 법인을 말한다(개정 제조물책임지침 제4조 제14항). [본문으로]
- 박신욱(각주 9), 305쪽. [본문으로]
- 이에 관하여는 별도의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본문으로]
- 국제재판관할권이 인정되는지는 구체적 사안별로 따져보아야 할 것이나 기본적으로 불법행위책임 소송에서 손해발생지 법정지국 법원에 관할권이 인정된다. 우리의 경우에도 월남전에서 고엽제 살포로 인한 제조물책임이 문제된 사안에서 대법원은 피고(고엽제 제조사)가 미국 소재 법인이었지만 우리나라 법원의 국제재판관할권을 인정하였다. 대법원 2013. 7. 12. 선고 2006다17553 판결 참조. [본문으로]
-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 참조. [본문으로]
- 구 지침의 경우에도 1985. 7. 25. 공포되었으나 13년이나 지난 1998. 5. 21.에 와서야 EU 전 회원국에서 지침의 국내 입법이 완료되었다. 최광준, “유럽공동체 제조물책임 입법지침(85/374)과 그 준수현황”, 유럽연구 제20권(2004. 12.), 134쪽. [본문으로]
- European Commission, the 2025 Commission work programme, annexes p.26. https://ec.europa.eu/commission/presscorner/detail/en/ip_25_46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