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루만의 메모가 만날 때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9만 장이 넘는 메모를 작성하며 평생을 지식과 대화했다. 그의 메모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질문과 연결의 장치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만나고, 충돌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낳는가였다. ‘제텔카스텐(Zettelkasten)’이라 불리는 이 시스템은 메모 하나하나를 독립적이되 유기적으로 연결된 단위로 관리했다.1 루만은 한 장의 메모를 쓰는 대신, 그것이 다른 메모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했다. 이 방식은 단지 글쓰기 도구나 아이디어 정리법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탐색하는 고유한 사고 구조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메모는 하나의 ‘지적 생태계’로 작동했고, 루만은 그것을 통해 자신과 세계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이선 몰릭(Ethan Mollick)의 『듀얼 브레인(Dual Brain)』은 루만의 방식이 인공지능 시대에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 몰릭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 교수로, 기업가 정신과 기술 혁신, 특히 최근에는 AI 활용법에 집중하며 실험과 교육을 병행해온 인물이다.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사실 단순하다. “지금 당신 옆에는 새로운 형태의 두뇌, 곧 AI가 있다. 이 새로운 두뇌와의 협업을 통해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이다.
이 책은 AI 시대에 인간의 사고 능력이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될 수 있다는 낙관적 가설에 기반한다. 몰릭은 Chat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 느꼈던 흥분을 감추지 않는다. 그는 삼 일 밤낮을 새웠다고 한다. 단순한 기술적 충격 때문이 아니라, 인간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감각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듀얼 브레인’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뇌와 디지털 뇌(AI)가 상호 보완하며 작동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 환경을 의미한다.
몰릭은 AI를 단순한 보조도구가 아닌, 사고의 동반자, 심지어는 ‘지적 존재’로 간주한다. AI는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지만, 사고를 돕는 방식은 사람보다 유능할 수 있다. 그는 AI의 역할을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창작자, 동료, 교사, 코치, 그리고 또 하나의 인간. 이 구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각각의 역할은 인간과 AI가 어떤 방식으로 대화하고, 서로를 어떻게 신뢰하고,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틀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AI를 통해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몰릭은 이를 ‘사고의 외주화’가 아니라 ‘사고의 확장’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당신이 어떤 윤리적 딜레마를 AI와 함께 탐색하고, 반론을 주고받고, 또 다른 논점을 도출해 내는 방식은, 루만이 자기 메모를 통해 자신과 반대 입장을 구성하고 재반박하던 방식과도 유사하다. 이 점에서 몰릭의 사고는 전통적인 철학적 성찰법과도 궤를 같이 한다.
그의 대표적 개념 중 하나인 ‘켄타우로스 모델’은 AI와 인간의 협업 가능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주지하다시피 켄타우로스는 말과 인간이 결합한 신화적 존재다. AI는 강력한 계산 능력과 데이터 분석력을 제공하고, 인간은 맥락 이해, 윤리적 판단, 감정적 직관을 제공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 두 존재의 협업이 AI 단독보다 더 뛰어난 전략을 보여준 사례는, 몰릭이 말하는 듀얼 브레인의 효율성을 뒷받침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AI와 어떻게 함께 생각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중심축이 이동한다는 것이다.
몰릭은 인간과 AI가 진정한 ‘공동지능(co-intelligence)’으로 기능하기 위해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AI를 항상 업무에 초대하라. 제한 없이 자주 사용해보는 것이 협업의 기초라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여전히 중심에 있어야 하며, AI의 오류와 환각 가능성에 책임 있게 개입해야 한다. 셋째, AI를 사람처럼 대하되, 구체적인 역할(예: 변호사, 컨설턴트)을 명확히 지시해야 더 정교한 응답을 끌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AI는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AI 중 가장 성능이 낮은 버전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몰릭은 이 네 가지 원칙이 단순한 기술 활용법이 아니라, 우리가 AI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더 넓게는 어떤 인간이 되고자 하는지를 묻는 철학적 전제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를 단순한 가이드라인이 아닌, AI 시대의 새로운 ‘사고 윤리’로 제시한다.
한편 몰릭은 이 책에서 AI의 ‘정렬(alignment)’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2 AI가 인간의 가치와 의도를 따라야 한다는(즉, 이에 따라 ‘정렬’되어야 한다는) 이 논점은 AI 윤리라는 이론적 측면뿐 아니라 AI 개발과 같은 현실적 측면에서 모두 핵심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AI가 아무리 ‘똑똑’해지더라도 AI가 인간과 다른 목적으로 ‘정렬’되어 있다면 대재앙(catastrophe)이 될 수 있다는 경고는, 단지 공상과학소설에서의 상상이 아니라 오늘날 AI 연구자들이 매일 고민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다. 몰릭은 이 부분에서 다소 이론적이지만, 매우 시의적이며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AI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은 누구의 기준인가? 위 질문과 관련하여 몰릭이 『듀얼 브레인』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관계 맺기의 방식’이다. AI와의 관계는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는 효율성 중심의 관계가 아니라, 사고의 폭을 넓히고, 인간성을 되돌아보는 존재론적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AI를 기술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기술 안내서가 아니라 철학적 선언문(manifesto)처럼 읽히기도 한다.
솔직히 필자 입장에서는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AI를 쓰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식의 경고가 때론 지나치게 조급하게, 때로는 지나치게 진부하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얼 브레인』은 단순한 사용법이 아니라, AI와 인간의 새로운 상호작용 모델을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몰릭은 이 책에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질문의 깊이는 얕지 않다. “당신은 어떤 AI를 원합니까?”라는 물음은 단지 기술적 선택을 묻는 게 아니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디지털 도구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그 도구들이 우리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묻는 책은 많지 않다. 『듀얼 브레인』은 바로 그 질문을 던지는 책 중의 하나이다. 몰릭은 AI를 단순히 ‘효율을 높이는 기계’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AI와의 상호작용이 우리 내면의 사고 습관, 가치 판단,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렇기에 이 책은 기술서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인간학이다. AI는 몰릭에게 있어서 단지 정보 처리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성을 재정의하는 거울이며, 인간의 지적 역량을 자극하는 질문 생성기다. 루만이 수천 장의 ‘오프라인’ 메모를 통해 자기 자신과 평생을 대화했다면, 몰릭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AI라는 제2의 ‘온라인’ 지성과 사유의 대화를 시작하라고 권유한다. 그것은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몰릭이 말하듯, 그 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대화에 얼마나 주체적으로 참여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