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세대 :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The Anxious Generation: How the Great Rewiring of Childhood is Causing an Epidemic of Mental Illness.

I. 시작하며

이 책의 저자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2018년부터 소셜미디어가 십대의 정신건강 쇠퇴와 민주주의에 미치는 손상에 대하여 연구했다. 저자는 임상심리학자나 미디어 연구자가 아닌 사회심리학자로써 십대의 정신건강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Z세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돌려 흥미진진하고 중독성이 강하고 불안정하며, 그리고 아동과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대체 우주로 오라고 유혹하는 ”포털“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사춘기를 보내는 역사상 최초의 세대”라고 언급하고 있다.1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된 주요 원인으로 “놀이 기반 아동기”를 대체한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를 지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제1부에서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로의 전환으로 십대의 정신건강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보여준다. 제2부에서는 스마트폰이 ‘경험 차단제’ 역할을 함으로써 청소년이 경험해야 할 필수적인 사회적 경험 습득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제3부에서는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가 아동의 발달을 방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들을 소개하면서 특히 ‘소셜미디어 사용’과 정신질환은 ‘상관관계’가 아니라 ‘원인’임을 강력히 피력한다. 제4부에서는 테크회사와 정부, 학교, 부모가 해야할 것들을 제안한다. 특히 이러한 제안의 핵심은 “1.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 2. 16세가 되기 전에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3.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한다. 4. 감시를 받지 않는 놀이와 아동의 독립성을 더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소셜미디어‧스마트폰으로 인해 미국 Z세대가 정신건강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러한 위기는 너무나도 긴급하고 즉각적 조치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정보기술과 법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학자이기 전에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이 만연한 디지털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두 아이를 양육, 공존하는 부모로써 저자의 이러한 주장과 관련하여 고민해봐야 할 몇 개의 함의를 뽑고자 한다.

II. 고민이 되는 지점들

1. 역사적 맥락에서 아동이 행복한 시대는 언제였을까. 과연 지금은?

고대 사회 아동은 주로 부모나 가문의 재산으로 여겨졌으며, 유아 살해, 버려지는 아동(유기 아동)이 흔했다. 중세시대 아동은 엄격한 종교윤리와 계층사회 속에서 노동과 체벌의 대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동의 탄생》(1960)으로 유명한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ès) 같은 역사가에 따르면 중세시대에는 “아동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어린이는 단순히 ‘축소된 형태의 성인’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성인의 세계에 빨리 편입되어 노동과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이후 근대로 입문하는 산업혁명 시기에 아동은 더더욱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특히 부르주아 혁명과 자본주의의 폐해는 그대로 아동의 ‘노동 착취’심화로 이어졌다. 이후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념의 상극 및 포화 속에서 가장 큰 희생양이 된 존재 역시 아동과 여성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인류에서 아동인권을 통해 아이들의 존귀함을 공식화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일이다. 1924년 제네바 선언(아동 권리에 대한 최초의 국제 선언)이 있었지만 아동인권은 여전히 미약했고, 20세기 후반에서야 본격적으로 권리의 주체로 등극하게 된다. 작금의 현대에 이르러서야 아동‧청소년은 보호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자율적 존재’이며, ‘권리의 주체’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현대의 시기 중 지난 20여 년을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라 칭하며 이 시기에 아동‧청소년은 친구와 대면하지 못하는 ‘사회적 박탈’, ‘수면 박탈’, 집중하지 못하는 ‘주의 분산’ 그리고 ‘중독’이라는 해악을 겪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들의 정신건강이 크게 나빠졌다고 한다.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아동‧청소년을 노동의 속박에서 벗어나며, 권리의 주체로 등극시킨 이 ‘해방’의 시기를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로 인한 ‘해악’의 시기로만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며 인간의 사용이 방향을 결정한다. 지금까지 기술의 진보가 경제적 풍요와 지식의 융성을 가져왔고 사회를 더 평등하게 만들면서 아동‧청소년의 인권을 존중하는 진보를 이끌었다. 일례로 코비드19(COVID-19) 시기 스마트폰/소셜미디어는 ‘사회적 박탈’이 아니라 소통의 아이콘으로 인간을 연결해 주었으며, 참여와 교육의 수단으로 아동과 청소년의 성장을 도왔다. 같은 도구가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평가받는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2.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는 바람직한 “놀이”가 될 수 없는가.

저자는 “사실, 스마트폰과 그 밖의 디지털 기기는 아동과 청소년에게 흥미로운 경험을 너무나도 많이 제공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것들은 화면에 기반을 두지 않는 형태의 경험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킨다..(중략)..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나 비디오게임 콘솔이 아이의 삶에 침투하면 나머지 활동을 대부분 혹은 적어도 밀어낸다”2 고 기술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 속 세상과 현실 세계를 분리된 세계로 보며, 디지털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와 현실이 상호작용하면서 시너지를 내게 된다면 아동‧청소년의 새로운 ‘놀이’로 등극할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디지털 세계를 밀어내기보다는 현실 세계와 조응(照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내는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런 제안을 해본다.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녀의 활동은 많은 청소년이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데 영감을 주었다. 그밖에 미국의 한 청소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살 예방 핫라인을 접하고 생명을 구한 사례, 한 고등학생이 링크드인(LinkedIn)을 통해 관심 있는 분야의 멘토를 찾고, 인턴십 기회를 얻어 자신의 진로를 구체화한 사례, 유튜브를 통해 코딩, 디자인, 사진 편집 같은 기술을 배우고 이를 통해 창업을 시작한 청소년의 사례, 자연재해로 인해 학교가 폐쇄된 지역에서 학생들이 온라인으로 함께 학습하며 학업을 지속한 사례 등 디지털 기기가 아동‧청소년에게 창조적 ‘놀이’이자 ‘기회’의 아이콘이 된 사례는 이미 충분하다.

3.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노출이 여자아이에게 더 심각한 것일까.

제6장에서 저자는 “왜 소셜 미디어는 남자아이보다 여자아이에게 더 해로운가” 를 다루고 있다. 여러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여자아이가 소셜미디어에 더 취약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남자아이는 주체성 활동을 더 많이 원하고, 여자아이는 융화성 활동을 더 많이 원한다”고3 전제한 후 여자아이가 소셜미디어에 특별히 취약한 네 가지 이유로 “1.여자아이는 시각적 사회 비교와 완벽주의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2. 여자아이의 공격성은 더 관계적이다. 3. 여자아이는 감정과 장애를 더 쉽게 공유한다. 4. 여자아이는 약탈과 괴롭힘에 더 취약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더불어 “2010년대 초반에 미국 십대 남자아이들의 사고 패턴이 전통적인 것(내면화 인지와 행동보다 외면화 인지와 행동비율이 더 높았던 것)으로부터 여자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내면화 비율이 더 높은)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남자아이들은 위험을 피하기 시작했다”4 고 언급하면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다름을 견고히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정하에 성별을 중심으로 소셜미디어 취약성을 분석하는 것은 자칫 남성 청소년이나 성소수자 청소년이 직면하는 고유한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의 취약성은 성별뿐 아니라, 연령, 자존감, 사회경제적 지위, 기술 이해 수준, 부모의 관여 정도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 비교의 영향을 받는 정도는 성별보다는 개인적 성향(예: 자존감 수준, 사회적 지위에 대한 민감성)과 성장환경적 요소에 더 많이 좌우될 수 있다. 관계적 공격성(예: 소문 퍼뜨리기, 따돌림)은 여자아이들에게서 더 흔하다는 연구들이 있지만, 이는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해석일 수 있다. 감정을 더 쉽게 공유한다는 주장 역시 성별에 따라 고정된 특성이 아니라, 문화적 환경과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뿐만아니라 소셜미디어에서 감정 공유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및 모든 성별 사용자들에게도 나타나는 보편적인 행동이다. 특히 여자아이가 약탈과 괴롭힘에 더 취약하다는 단정은 성별을 취약성의 주요 기준으로 삼아 여자아이를 피해자로 낙인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스마트폰 등 디지털기기가 아동청소년에게 초래하는 해악을 면밀히 분석하고 드러내고자 한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나, 저자의 선한 의도가 자칫 성별 취약성에 대한 지나친 일반화 혹은 단순화로 오인될까 우려스럽다.

III. 마무리

한때 우리나라에서 미성년자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방치,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해당 미성년자 부모는 하루 중 상당 시간 게임에 할애하였고 결국 ‘게임중독’이 아동 방치 및 사망에 이르게 한 원인인 것처럼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그렇다면 ‘게임’이 없었다면 이 미성년자 부모는 아이를 방치하지 않고 잘 보호하고 양육하였을까? 과연 아이들이 겪는 해악이 소셜미디어/스마트폰으로 인한 것이며, 이러한 디지털 기기가 사라지면 이러한 해악도 해결될까? 그렇다면 과거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없을 때 아이들은 왜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며 더 처참한 해악 속에서 살아야 했을까?

사태의 본질을 보지 않고 현상만을 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저자 역시 부모에게 스마트폰은 가급적 손에 쥐여주는 시기를 늦추며, 다른 부모들과 협력하여, 첨단기술 접근하는 시간을 줄이고, 현실세계 관여와 공동체 소속감을 높이는 방법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아이를 잘 키우는데는 현명한 부모의 시간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부의 양극화와 경쟁은 심화되고 물가는 계속 치솟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부모는 생계유지와 좋은 교육 혜택을 부여하기 위해 충분한 ‘돈’을 벌어야 한다.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기 보다 경제활동에 주력할 수 밖에 없다. 본질은 결국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지나친 경쟁, 물질 만능주의, 경제 양극화 등 구조적 문제다. 아이들 역시 이러한 세상에서 본능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한다. 하지만 이 연약한 존재들은 이러한 부담스러운 자각 속에서 부모와 제도와 사회로부터 헤쳐나갈 용기와 힘을 얻지 못한 채,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라는 피난처에 몰입하게 된 것이 아닐까.

저자가 언급하였듯이 “어린 포유류는 놀길 원하고, 놀 필요가 있으며, 놀이를 박탈당하면 사회적, 인지적, 정서적 손상을 입는다”는5 연구는 지당하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놀이’속에 스마트폰이나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 기기가 들어왔다. 이들을 놀이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들을 아주 잘 가지고 놀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1. 이 책, 22쪽 [본문으로]
  2. 이 책, 152쪽 [본문으로]
  3. 이 책, 245쪽 [본문으로]
  4. 이 책, 291쪽 [본문으로]
  5. 이 책, 85쪽 [본문으로]
저자 : 김현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 / KISO저널 편집위원 / 개인정보보호법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