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지난 2022년 일본에선 올해의 신조어로 ‘타이파’라는 단어가 선정됐다. 이는 ‘타임 퍼포먼스(Time Performance)’를 일본식 영어발음으로 줄인 표현이다. 숏폼이 영상콘텐츠의 대세로 떠오르고 영상 재생속도를 1.2~2배로 설정해 빠르게 소비하는 현상을 단어에 고스란히 담았다. 한국어로 유사하게 표현하자면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가 바로 타이파다.
‘타이파 시대’를 만든 대표적인 축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이다. 유튜브는 예전부터 재생 속도를 2배까지 빠르게 설정할 수 있도록 옵션을 제공해왔다. 넷플릭스도 지난 2020년 영상 재생 속도를 0.5배~1.5배속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출시했다. 대표적인 두 영상 스트리밍 업체의 기능은 새로운 영상 소비 습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제는 대세가 된 영상 소비 습관에 맞춰 유튜브는 속도 조절을 더 쉽고 직관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내놨다. 영상 재생 중인 화면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으면 2배속 재생이 되고 손가락을 떼면 정상 속도인 1배속 재생으로 돌아오는 기능이다. 기술이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습관이 다시 서비스에 영향을 미치는 사이클이 지속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지난 2021년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대학에서 2~4학년 학생 128명을 대상으로 영상 빨리 감기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87.6%가 빨리 감기 기능을 사용해 본 적 있다고 답했다. 10초씩 건너뛰며 영상을 시청해 본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91.4%에 달한다. 사실상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상을 빨리 감거나 건너뛰면서 본인이 원하는 장면 중심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이 같은 영상 시청 습관이 익숙하고 보편적이어서 특별한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이 현상에 “왜?”라는 물음표를 붙이며 그 이면을 파고들어간다.
1. 수많은 영상이 공급되는 시대
책에서 꼽는 첫 번째 배경은 봐야 할 영상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점이다. 저자는 현재를 “역사상 가장 많은 영상 작품을 가장 값싸게 볼 수 있는 시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화 한 편이 들어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대여점에서 빌려 반복해서 보고 또 보던 시대는 넷플릭스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렸다. 영화 제작사나 지상파 방송사에서 송출하던 영상만 볼 수 있던 시대는 모두가 영상 업로드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유튜브가 생기면서 힘을 잃었다. 넷플릭스·유튜브·인스타그램·틱톡 등 핸드폰에서 몇 개 앱을 누르기만 해도 순식간에 수백, 수천 개의 영상에 휩싸이는 것이 가능하다.
더구나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대화 주제는 “그거 봤어?”다. 인기를 끄는 넷플릭스 드라마부터 유행하는 틱톡 챌린지, 논란이 된 연예인 유튜브 영상까지 모두 챙겨보려면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빨리 감기로 핵심만 쏙쏙 뽑아 보고 유행을 따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 시간 가성비를 추구하는 시대
바쁜 현대인들에게 낭비는 악이고 가성비는 정의다. 방대한 시간을 들여 수많은 작품을 보며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가는 일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그보다는 ‘치트키’를 써서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인 성과를 내는 방식이 선호된다. 더 이상 사람들은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다. 대신 ‘콘텐츠를 소비’한다. 작품을 음미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주인공이 말없이 허공을 쳐다보는 10초, 수면 위로 석양이 지는 10초가 소중할 수밖에 없다. 모든 10초의 순간들엔 감독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래 친구와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목적을 위해 콘텐츠를 소비한다면 그 10초는 건너뛰어도 상관없는 무의미한 순간일 뿐이다.
대화를 따라가기 위해 콘텐츠를 소비하는 현상은 10~20대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SNS가 일반화된 사회에선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친구와 연결돼있다. 손쉽게 서로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환경 속에서 유행하는 콘텐츠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또래 집단 사이에서 후폭풍이 따라온다. 저자가 책에서 인터뷰를 한 인물 중 한 명은 이를 생존 전략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가성비를 추구하는 현상은 실패를 피하고 싶어 하는 심리와도 연결된다. 실패하고 싶지 않다보니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불쾌한 장면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 있는지 스포일러로 살펴보기까지 한다. 웹소설은 언젠가부터 내용을 압축적이고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제목 일색이다. 인기 있는 웹소설은 과거로 회귀해 현대의 지식으로 최고가 되거나 완벽한 인물로 환생하는 ‘먼치킨’ 캐릭터가 필수가 됐다.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의 의미를 고민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려 노력하는 일은 가성비가 떨어진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총감독 안노 히데야키는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내용을 즐기는 사람들이 줄어든 세상”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성비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생각과 방향들은 점차 갈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3.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시대
1953년 영화인 ‘로마의 휴일’ 한 장면. 오드리 햅번이 연기한 앤 공주가 각국의 중요 인사들과 차례로 악수하며 인사를 나눈다. 시종일관 지루해 보이는 표정으로 발끝을 꼼지락거리다가 그만 구두를 놓쳐버린다. 관객들은 지루하다는 대사 한 마디 나오지 않아도 앤 공주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2019년 첫 방영된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1회.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눈 속을 달리며 “숨이 차다. 얼어 있던 공기 때문에 폐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절벽에서 떨어진 후엔 “눈 덕분에 살았군”이라고 말한다. 달리는 장면 속 성우의 가쁜 호흡만으로 충분히 표현되는 상황임에도 주인공의 상태를 상세한 대사로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60여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영상 표현 방식도 바꿔 놨다. 이용자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상보다는 갈수록 이해하기 편리한 콘텐츠를 선호한다. 제작자는 이 추세를 따르다보니 영상 속에 대사와 자막을 가득 채운다. 다시, 이용자는 대사로 꽉 찬 영상을 보다보니 말이 없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건너뛰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지금과 같은 현상을 만들어냈다.
4. 다음 10년 뒤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현상을 ‘리퀴드 소비(Liquid Comsumption)’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리퀴드 소비는 2017년 플로라 버디와 기아나 에커트라는 연구자들이 논문에서 밝힌 현대 사회의 소비 개념으로, 흐르는 액체처럼 유동적으로 시시각각 변한다는 의미다. 이를 콘텐츠 소비와 연결시키면 (1)콘텐츠가 유행하는 타이밍에 시청하기 위해 영상 핵심 부분만 건너뛰면서 소비 (2)수많은 콘텐츠를 일정 기간 동안 시청할 권리를 사기 때문에 작품 자체에 대한 애착 약화 등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 같은 특징들이 물론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빨리 감기든 건너뛰기든 이미 보편적인 시청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과거 영화관에서만 영화를 보다가 처음 TV가 생겼을 때, 공연장에서만 음악을 듣다가 레코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부정적인 행동양식과 인식이 등장했을 것이다. 지금은 레트로 바람과 함께 레코드 음악만의 감성을 찾아다니는 팬들이 있지만 과거엔 일본 음악 평론가 오다 구로모토는 레코드 음악을 ‘통조림 음악’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욕구는 기술을 진화시키고 기술은 다시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지금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셈이다. 여기까지 오니 책을 덮는 순간 한 가지 궁금증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면 다음 10년 뒤 우리는 또 어떤 ‘콘텐츠’를 어떻게 ‘소비’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