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에서 돌봄의 시대로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 이 글을 쓰는 장소는 고속철의 객실입니다.’ 시대예보라는 중대한 주제에 비해 책의 프롤로그를 시작하는 첫마디는 가볍고 경쾌하다. 이 글 역시 저자의 관점에서 출발해보고자, 국토를 연결하는 2시간 남짓한 여정에서 네트워크와 노트북에 의존해 작성하기로 한다. 출발 10분을 남기고 가까스로 역사에 도착했지만, 미리 앱으로 주문한 커피를 픽업해서 좌석에 앉는 데까지 충분한 시간이었다. 곧 한숨을 돌리고 좌석 아래 포트에 충전 케이블을 연결한 노트북으로 쾌적하게 글을 써 내려간다. 이러한 일상이 생소하지 않은 것을 보니 기술시대의 동시성과 편리함은 현대인의 특권임이 분명하다.

한편 저자는 스마트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매표소를 서성이는 노인들의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이는 ‘새로운 공정함에 배려받지 못하는 그늘’로 표현되었다.1 이 시대의 공정함이란, 개인의 사회적, 신체적 조건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기술에 대한 인류의 소망을 뜻하는 것이리라. 이 책의 저자는 시대 변화를 분석해 사람들을 일깨우는 메신저로 잘 알려진 송길영 님이다. 그는 AI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가 대체되는 현상을 덤덤히 서사하며 이때 등장한 ‘핵’ 개인의 존재와 그들의 생존전략을 소개하면서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도태될 것인지’에 관한 제법 시급한 요청을 던진다. 그가 제시한 새로운 시대의 예견은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관찰한 개인적인 관심사에도 맞닿아 있기에 더욱 흥미와 기대를 담아 이 글을 엮어보려고 한다.

국가의 붕괴, 삶의 단위는 도시, 확장된 도시로 연결되다

이전에 우리는 세계화 덕에 집약된 노동력을 값싸게 얻고, 국경을 넘어서 해외를 넘나들며 여행하고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러다 팬데믹 기간, 미국과 유럽이 락다운 될 때 스마트 기기와 네트워크에 능숙한 사람들로 무장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진가를 드러냈고 한국인이 만든 한국어로 된 드라마, 영화, BTS와 블랙핑크의 음악, 음식이 관심을 끌었다. K컬처가 한국적인 정서에 뿌리를 둔 사람들과 문화로부터 발견된 것이라고 할 때, 이제는 영토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개방된 세계관을 형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요청이다. 이 책은 그 속성으로 도시 중심의 연대와 세계관을 제시한다. 뉴욕, 파리, 런던, 상하이, 도쿄 그리고 서울의 사람들은 비슷한 문화와 가치관, 삶에의 열망과 좌절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전문가인 유현준 교수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오프라인 공간이 가상공간으로 옮겨지면서 지역이 발전하고 도시가 해체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익명성을 가진 채 대면할 수 있는 공원이 있는 도시를 찾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책에서도 도시의 확장을 예견한다. 이제 뉴욕이나 파리에 뒤지지 않은 문화를 가진 서울의 사람들이 한국의 지방 도시가 아닌 비슷한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조건을 가진 세계적인 도시의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지는 국적이 아닌, 자신의 취향에 맞는 도시의 문화를 찾아 나섰다. 개인화된 삶에서도 개인의 소속감과 준거집단에 대한 열망이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동시대인으로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집단 조직문화의 종식출퇴근, 상대평가, AI 코파일럿의 등장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개성과 능력으로 똘똘 뭉친 핵개인은 기존 사회시스템의 붕괴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하나, 출퇴근의 종식 뇌과학자인 연세대 김주환 교수는 현대인의 세끼 문화는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대규모 공장이 생겨나면서 숙련된 공장노동자의 출근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설비가 있는 곳으로 동 시간에 모였다 헤어지는 집단주의 효율성이 남긴 유물을 팬데믹이 깨뜨려 준 셈이다.

둘, 기존 평가시스템과 권위에의 거부 – “평가를 해도 보상 체계가 따라오지 못하는 상대평가 시스템은 열패감을 키우고 자기효능감을 떨어뜨립니다.…반론에도 기존시스템을 유지한다면, 평가 주체가 평가 대상에 대해 권력을 갖고 싶어서입니다.”2 기업과 조직의 평가방식 ‘먼저 자리를 차지한 집단’의 이해가 고수된다면, 추월차선 없는 고속도로와 다름없다고 한다. 경쟁시스템을 눈치챈 핵개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가치화하는 길을 모색하고, 코즈모폴리턴을 자처한다.

셋, 팀원을 대체하는 AI 코파일럿 – 회식 자리에서 하이볼을 주문하는 신입에 하소연하는 팀장님 사례는 직장인들에게 꽤 익숙한 이야기이다. 또한 출퇴근 전후 30분을 업무를 준비하거나 정리하는 시간으로 여겼던 팀장님과 정시를 출퇴근으로 생각하는 신입직원의 생각이 같을 리 없다. 문제는 오후 6시 무렵에서야 경영진에게서 떨어진 일을 처리해야 하는 팀장 본인은 이미 사라진 팀원들을 뒷모습을 아쉬워하며 혼자 밤샘 작업을 해야 하는 사정이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AI 팀원이다. AI 팀원은 급여인상이나, 승진, 보너스를 요구하지도 노조에 가입하거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렇듯 AI 코파일럿3 은 단순히 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면이 필요한 일들에서 물리적, 정서적 행위를 대신해 줄 것이다.

, 평생직장 대신 평생직업 일반적으로 ‘평생직장’이라 함은 권위 있는 대학교 졸업장으로 안정적인 조직에 입사해 승진, 보상, 정년을 보장받고 60세가 지나면 연금을 받는 여생으로 안내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자신의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숫자는 예전 같지 않다. 여기저기서 인간의 수명은 100세를 넘게 되었고, AI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과업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준비된 핵개인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성장과 사회적 기여가 가능한 일에 AI 코파일럿과 협력함으로써 더 높은 생산성에 도달할 것이다. 반면, 기술변화로 인해 급작스럽게 변한 환경들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도태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면 당연히 주어진 평생직장, 시니어로서의 예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연된 보상을 과감히 포기하고 핵개인으로 무장돼 새로운 가치와 평생직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일까?

새로운 권위, 노인의 지혜, 연륜

글쓴이가 즐겨 보는 몇 안 되는 유튜브의 주인공은 ‘밀라논나’이다.4 그녀는 ‘할머니(Nonna)’를 자칭하지만, 패션계에서 눈부신 활동을 해온 권위자이자 젊은이들은 선망하는 감각과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밀라논나는 “늙은이의 경륜, 지혜 이런 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어요? 요즘 시대에는 인터넷 찾아보면 다 나오잖아?” 며 겸연쩍은 너스레로 시작해 인생의 선배로서 체득한 것들을 요즘 세대의 언어로 전달한다. 앞선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 책에서도 노인이 체득한 삶의 지혜는 인터넷에 검색결과로도 알 수 있고, 이 때문인지 선배, 어른, 노인들의 권위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기존의 권위는 쪼개지고 새로운 인정시스템에 의해 융합되며, 경험, 연륜, 전문성으로 쌓아온 과거의 권위가 데이터와 AI 기술, 네트워크로써 그 가치가 퇴색되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맞는 예견들이다. 하지만 어중간한 세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인터넷이나 AI에 남겨진 지식이 있더라도 십 년 더 앞선 선배들을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선배의 조언이 나침반이 되거나 불안한 발걸음을 지지해 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격려나 위로에서 비롯된 감정일 수도 있겠지만, 나이듦이 대접받아야 하는 이유가 아니듯 홀대받을 이유도 아니다. 가장 경쟁력 있는 사람은 자기만의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서사(narrative)가 있는 핵개인이라고 할 때, 글쓴이는 앞선 시간을 걸어간 밀라논나들의 경험과 이야기가 아직 궁금하다.

친절한 개인주의와 다양성 한국사회의 근원적 스트레스와 그 해소

서평을 의뢰받고, 가볍게 술술 읽을 것이란 기대와 달리, 새로운 화두가 제시될 때마다 멈칫하며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타인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과 미래에 대한 예측에는 개인적인 시각과 기존의 가치관과의 조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대목에서는 절반은 부도가 예정된 어음을 들고 있는 듯한 불편함이, 또 어떤 대목에서는 새로운 출발선에 선 듯한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이렇듯 독자가 저자가 던진 화두에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다면, 바로 이 점이 저자가 원하는 바가 아닐까?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현대인은 우주에 던져진 존재로서 대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나마 그 안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타자와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보살피고 보살핌 받는 존재라고 믿고 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주체적인 개인의 그만두기와 집중하기, 그리고 연결된 생태계에서 우연의 선물(serendipity)인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세상과의 연결성을 유지하고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대사인 친절하라(Be kind!)로 세상을 대할 때, 그 보살핌과 친절은 다시 메아리쳐 돌아올 것이다.5 다만 이러한 핵개인의 자기결정권에서 비롯된 여유와 따뜻한 면모가 책의 후반부에서야 드러나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타자와 자신에 대한 보살핌의 시민적 자질이야말로 이른바 핵개인에게 필수적인 소양일 것이다. 긴 글을 마치며, 친절한 핵개인들의 미래에 얼마든지 앞지르기와 서행이 가능한 드넓은 고속도로가 펼쳐지기를 바란다.

  1. 송길영,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한빛비즈(2021), 11면. [본문으로]
  2. 송길영, 이 책 본문, 329면. [본문으로]
  3. 코파일럿은 항공업에서 부조종사의 역할을 말하는데, 생성 AI가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인간의 업무를 대신하지만, 인간의 생리적 한계에 국한되지 않은 로봇을 지칭한다. 송길영, 이 책 본문, 91면. [본문으로]
  4. 한국인 최초로 밀라노에 유학은 떠난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의상, 무용 공연, <아이다>, <춘향전> 등 연극 및 오페라의 무대 의상 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이자, 100만 유튜버인 1952년생 장명숙 님이다. 장명숙,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김영사, 2021. [본문으로]
  5. “무례와 혐오, 경쟁과 분열, 비교와 나태,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기 바란다”, “서로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주시길.” 필즈상 수장자인 ‘허준이 교수’의 제76회 후기 서울대 후기 학위수여식 연사 中. [본문으로]
저자 : 이희옥

KISO저널 편집위원 / 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