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권리

1. 표현의 자유, 왜 중요한가?

표현의 자유라고 하면 왠지 진부한 주제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선진국’ 대한민국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놓고 다퉈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그 나라의 발전 수준과 무관하게 늘 중요한 이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가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중요성 때문이다.

첫째, 표현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이며,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다.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삶의 양식이었다. 그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둘째, 표현의 자유는 다른 권리가 보장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어떤 권리가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 투쟁의 첫 출발점은 바로 나의 권리를 대외적으로 말하고 연대를 호소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다른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전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로 인해 건강권의 위협을 받게 된 취약계층 시민이 있다고 했을 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조치는 바로, 나의 건강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표현’하고 자신의 주장에 동참할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다면 건강권을 지키기도 어려워진다.

세 번째로 표현의 자유는 어떤 국가나 공동체의 발전 수준을 평가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 어떤 공동체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다양한 의견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양성이 존중된다는 것을 뜻한다. 반목과 갈등보다는 대화를 통해 평화가 유지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거친 언쟁이 오가더라도, 총칼을 들고 싸우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는 그 사회가 더 발전할 가능성을 보장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떤 소수의 의견이 미래를 선취하는 혁신적 이론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가능성을 봉쇄하지 않는 사회가 영리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새로운 전선

그런데 오늘날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한국은 물론 이미 민주주의와 인권이 상당 수준 발전한 국가들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다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오늘날 세계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정치적 분쟁이 오히려 격화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전통적인 대립 구도는, 진보 또는 좌파가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반면 보수 또는 우파는 공동체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도 좋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 구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극단주의와 맞서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권의 제한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것은 진보와 보수가 별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진보로 분류되는 정부에서 더 강력한 규제를 주장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인터넷 게시물에 대해 공격적인 규제를 하거나 무리한 수사나 인신구속까지 불사하는 경우들도 종종 문제가 되어왔다. 이 와중에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난민, 이주자, 무슬림 등에 대한 공격적인 발언을 혐오표현(hate speech)으로 규정하여 규제하자고 한 것은 오히려 진보였다. 여기에 맞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것인 오히려 보수였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전통적인 대립 전선은 그렇게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3. 한국에서의 표현의 자유 논쟁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진보는 더 이상 표현의 자유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실제로 5.18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민주화운동 왜곡, 일제 찬양 발언, 가짜뉴스 등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정치적으로 진보에 속한 쪽이었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때 집회시위의 자유, 인터넷에서의 표현의 자유, 공직자에 대한 명예훼손죄‧모욕죄 적용 등이 쟁점화 됐을 때만 해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전통적 대립이 유지되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꼭 그렇지 않다.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한 집회시위 자유, 가짜뉴스 엄정 대처, 허위보도 강경 대응, 공직자에 대한 명예훼손죄/모욕죄 적용 등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똑같이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보수에 속해 있는 쪽에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여 정부와 대립하는 것도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깨진 것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오히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치적 대립이 지양되어, 정파적 이익을 초월한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로 표현의 자유가 자리매김된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정치적 ‘진영 논리’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다. 표현의 자유를 정파적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이 더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그동안 논쟁이 되었던 가짜뉴스, 명예훼손죄, 허위보도 대응 등의 문제들에 대해 여야가 치열한 정치적 공방전을 벌였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여야가 바뀌었을 때도 각자 이런 입장에서 논쟁을 벌이게 될까?” 이렇게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고전적 대립이 무너지면서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다면 이건 퇴행이 아닐 수 없다.

4. 표현의 자유에 관한 기본적인 규칙으로 되돌아가자

문제가 꼬였을 때는 원래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고전적인 논쟁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정하는 것에 집중했다. 표현의 자유가 제약되어야 하는 예외적인 경우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정함으로써 거꾸로 그 예외에 속하지 않는 표현의 자유를 확고하게 보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 논법을 구사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다. 그가 말한 ‘해악의 원칙’(the Harm Principle)에 따르면, 타인에 대한 해악을 막으려는 목적 하에서만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로 개입할 수 있다고 한다(존 스튜어트 밀, 2010). 이를 표현의 자유에 적용해 보면, 어떤 표현이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경우에만 그 표현을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구체적인 해악이 없는 표현이라면, 설사 비도덕적이고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이라도 사회의 자정에 맡겨야지 국가가 규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정에 맡길 수 없는, 타인에게 분명한 해악을 미치는 표현이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표현의 자유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보장되는 미국에서도 폭력 선동, 실제 위협, 싸움을 거는 말(fighting words), 외설, 아동포르노, 명예훼손, 사생활침해, 감정적 스트레스에 대한 의도적 침해, 국가안보, 군사기밀 관련 표현 등에 대해서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방송, 공공기관, 상업광고, 학교 등의 일부 영역에서도 일부 표현에 대한 규제를 인정한다. 오랜 정치적 논쟁과 사법적 판단을 통해, 표현의 자유의 한계 영역을 명확하게 확정해온 것이다.

최근에는 혐오표현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논점의 논쟁이 진행 중이다. 혐오표현이 표현의 자유의 보호범위에 속하는지 여부를 놓고, 혐오표현의 ‘해악’이 무엇인지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외 논의를 보면, 혐오표현의 구체적인 해악의 발생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이와 함께, 혐오표현의 정치‧경제‧사회적 맥락, 발화자의 지위와 영향력, 발화자의 의도(고의성), 혐오표현의 대상집단, 혐오표현의 방법(전파 범위나 반복성 등), 예술적ㆍ학술적ㆍ종교적 기여 여부 등을 세심하게 살펴서 꼭 필요한 경우에만 규제가 정당화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Article19, 2018; 국가인권위원회, 2019; UN, 2019).

이러한 논의는 혐오표현 뿐만 아니라, 가짜뉴스나 공직자 명예훼손 등 오늘날 표현의 자유를 놓고 벌어지는 다양한 사례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순히 ‘바람직하지 않다’, ‘불쾌하다’,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는 식의 추상적 기준들은 결국 정파적 이익에 동원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사회적 자정에 맡길 수 없는, 그 해악의 분명한 표현이 무엇인지, 그 범위를 명확하게 확정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5. 표현의 자유에 대한 포럼이 필요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며, 다른 권리가 보장되기 위한 전제이기도 하고, 한 사회의 발전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다. 더 이상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소모적인 정치적인 논쟁을 벌여서는 안된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규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다시 한 번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포럼을 열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서로 의견을 주고 받고 싸워야할 주제들이 차고 넘친다. 표현의 자유는 일종의 게임의 규칙이다. 본 게임에 들어가도 치고받고 싸워야할 문제들이 수도 없이 있는데, 게임의 규칙을 놓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그 와중에 중요한 논점들을 토론할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무익한 논쟁을 멈추고 종지부를 찍어야,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다른 주제들을 놓고 논쟁을 이어갈 수가 있다.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논쟁을 하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참고문헌>

  • 존 스튜어트 밀(2010). 『자유론』. 서울: 책세상. .

Article 19(2018). “Prohibiting Incitement to Discrimination, Hostility or Violence.”

  • 국가인권위원회(2019), 『혐오표현 리포트』.

UN(2019), “United Nations Strategy and Plan of Action on Hate Speech.”

저자 :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 한국법사회학회 총무이사 / 한국법철학회 총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