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 개정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들
9년 만의 가이드라인 개정을 바라보는 소회
지난 2012년부터 시행되어 온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2011.12.26. 제정, 이하 ‘가이드라인’이라 함)이 9년여 만에 개정됐다. 제정 당시와 유사하게 이번 개정에 대해서도 여러 기대와 비판이 엇갈리고 있다. 그간의 5G 등 네트워크 기술발전과 시장 환경의 변화 요인을 수용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면 그 주기로는 다소 오랜 기간이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줄 만큼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을 기다려온 진영들이 존재한다. 반면에, 이번 개정으로 자칫 중립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변화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만만치 않게 대두되고 있다. 시행과정에 일부 분쟁이 없지는 않았지만 가이드라인 제정 이후 나름 견고하게 지켜온 중립성 중심의 시장 기조, 그리고 미국 등 주요국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지켜온 일관성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망 중립성(network neutrality)은 통신 업자가 유·무선 인터넷망을 이용해 전달하는 인터넷 트래픽에 대해 데이터의 내용이나 유형 등을 따지지 않고, 이를 만들거나 소비하는 주체들을 차별 없이 취급해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활동하는 어떠한 주체도 경쟁 조건의 우위나 열위 속에서 사업 활동을 수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비차별’과 ‘개방성’의 이념이 해당 원칙이 터를 잡고 있는 기반이다. 그 점에서 중립성은 폐쇄성 내지 편향성, 차별과 배치되는 상관관계를 지닌다.
필자가 속해 있는 경쟁법의 지대에서는 이 폐쇄, 편향, 차별이 전형적인 관심사이자 규제의 대상이지만, 그런 행위와 시도 모두를 법의 규제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는 없는 까닭에 중립성 위반을 경쟁법적 사후 수단으로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 점에서 일종의 사전 규제에 대한 수요와 효용이 발생하게 되는데, 전기통신사업법 이외에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이 그 역할을 상당 부분 수행해 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망 중립성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는 이 원칙의 적용에 따른 망 보유자의 유무형적 비용에 비해 다양한 공익상의 편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콘텐츠 기업들이 공생할 수 있는 생태계가 조성되고 개방화된 경쟁 환경을 통해 부가 가치가 창출되면, 이용자의 후생도 증가하는 연계고리가 중립성을 매개로 형성된다.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이 닦아 놓은 기반을 배경으로 해 중립성의 지평은 이제 망을 넘어 플랫폼 중립성(platform neutrality), 검색 중립성(search neutrality), 앱 중립성(app neutrality), 단말기 중립성(device neutrality) 등 연관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망 중립성의 지평 또한 IT 플랫폼 산업을 넘어 전기, 가스 등 전통적인 파이프 산업으로까지 연계되는 상황이다. 중립성은 이제 경제의 중요 준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은 중립성의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망 중립성은 망 보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종의 사회, 윤리적 요구로서 성숙한 자본주의 시장 환경에서나 기대, 실현될 수 있는 담론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에서 망 산업은 기간산업으로서 국가 등 공적 주체에 의해 형성된 공공재의 성격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망 보유사업자의 네트워크에 대한 비차별적으로 개방의 요구는 단순한 경제적 논리에 추가한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번 가이드라인에서는 중립성을 둘러싼 이해의 구도 속에 신기술 발전에 따른 또 다른 정책 수요를 수용 내지 조정했고, 그 점에서 이해관계의 구도가 좀 더 복잡해진 양상을 띠게 됐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2021 가이드라인 개정은 크게 세 가지의 변화를 담고 있다. 종전의 망 중립 예외 서비스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해 관리형 서비스 대신 EU의 특수 서비스(specialized service)와 미국의 Non-BIAS에 준하는 특수 서비스 개념을 도입한 점이 첫 번째다. 이 같은 신개념의 수용은, ‘인터넷 접속서비스와 네트워크 자원의 일부를 공유하되 망 중립성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서비스’를 인정하고 있는 최근의 국제적 추세에 발맞춘 것으로서 가이드라인의 위반, 준수 사이의 불명확했던 경계선을 다시 그어 준 의미가 있다.
단, 특수 서비스의 제공 요건으로서 특수 서비스가 제공될 경우에도 일반 이용자가 이용하는 인터넷의 품질은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통신사업자가 i> 인터넷접속서비스 품질을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하며, ii> 망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하도록 하고, iii> 특수 서비스를 망 중립성 원칙의 회피 목적으로 제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통신 사업자와 콘텐츠 사업자 등 이용자 간 정보 비대칭성을 완화하고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도 엿보인다. 통신사의 정보공개 대상을 확대하고, 정부가 인터넷 접속 서비스 품질 등을 점검하며, 관련 자료 제출을 통신사에 요청할 수 있도록 한 점이 그것이다.
논란은 왜 지속되는가?
종전의 가이드라인 환경에서 존재했던 우려 즉 망 중립성이 적용되지 않는 서비스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특수 서비스 개념이 도입됐지만 여전히 논쟁의 핵심인 네트워크 슬라이싱이 가능한 것인지가 여전히 모호하다.
ISP가 유지해야 하는 인터넷접속서비스 품질의 ‘적정 수준’도 임의적 해석이 가능한 데다 적정 수준이 기술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서 일반 인터넷 품질 저하나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EU의 규칙(EU Regulation 2015/2020)을 채용하면서도 ‘인터넷 품질 수준이 저하되지 않아야 한다’는 명확한 기준은 채용하지 않은 결과로 생각된다. 특수 서비스의 도입이 ISP만의 이익으로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설득력과 확신이 형성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용자가 인지할 수 있는 성능 저하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당국의 감시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한편 규범성이 없는 가이드라인이 어느 정도의 실효성을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지만 망 사업자나 콘텐츠 사업자의 입장에서 규제 당국이 제정한 가이드라인은 법령과 다를 바 없는 사실상의 구속력을 갖게 될 것이다. 가이드라인은 전기통신사업법상 금지행위, 이용자보호 관련 조항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차별금지, 차단금지, 투명성 확보 등에 관한 가이드라인 위반 행위는 전기통신사업법을 통해 제재될 것임은 물론이다. ISP의 입장에서는 개정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지점이 남아있는 가이드라인에 대한 불확실성과 법률 리스크가 여전히 크게 느껴질 이유이다.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에 따른 변화의 폭과 정도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됨에도 정작 가이드라인의 내용 자체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법 집행의 사례를 통해 세부 기준이 확인돼야 가이드라인의 의미가 명확해질 텐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라도 단기적 방안으로 가이드라인에 대한 구체적 해설을 통한 규제 당국의 소통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