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공간의 가상정체성과 현실공간의 실제정체성

 : “닉네임언급에 대한 게시중단 요청 사안” 심의결정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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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 관련 글 게시 중단에 대한 심의결과는 온라인공간의 가상정체성과 현실공간의 실제정체성간의 거리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으로 지지될 수 있다. 온라인공간이 일상생활로 들어오게 되면서 가장 커다란 특성이자 이슈가 된 것은 그 공간의 ‘익명성’이다. 현실공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은 온라인공간에서 자신의 실제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 발현을 시도한다.본 사안은 온라인공간에서 완전한 익명이 아닌 특정한 닉네임인 ‘□□’으로 신형 스마트폰을 계속 구입하는 자신의 소비행태를 올린 한 이용자가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다른 이용자들의 게시글들에 대해 분노하여, 이 글들의 삭제를 요청한 사안이다. 이 사안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이용자가 완전한 익명에 가까운 게시자명인 ‘oo’등을 사용하지 않고 ‘□□’이라는 고유한 닉네임을 사용하고 특정 온라인공간에서 지속적으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온라인사이트에서는 글을 올리기 위해서 반드시 회원가입을 할 필요가 없다. 이용자들은 자신의 익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oo’ 등의 게시자명으로 글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종종 완전한 익명성이 아니라 특정한 닉네임으로 아이디를 만들면서 소위 ‘고닉을 파는 경우’(고정 닉네임을 만드는 경우 : 회원가입을 해야 함)가 있다. 이 ‘고닉’들은 그 온라인공간에서 유명인으로 활동하면서 때로는 지지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집단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고닉’을 파는 경우에는 다른 이용자들이 그 닉네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용자가 닉네임에 애착을 갖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크다. 이 사안에서 또 하나 흥미롭게 봐야할 것은 ‘□□’ 닉네임 이용자가 다른 이들은 쉽게 할 수 없는 신형 스마트폰 사재기를 하면서 이를 온라인공간에서 ‘자랑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온라인공간과 소셜미디어공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자신의 사생활노출을 통한 사회적 지지얻기’ 행위이다. 페이스북 등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멋진 모습으로 구성하여 이를 사진과 글로 올리고 페이스북 친구들로부터 ‘멋지다’라는 댓글과 ‘좋아요’라는 지지를 얻는 것은 이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소셜미디어의 특성이다. 이러한 행위의 배경에는 현대사회에서 경쟁에서 소외된 우울감을 극복하고 자신이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페이스북의 경우에는 특히 사진들을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서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악성댓글 등이 사전에 차단되어 있고, 주로 ‘지지’를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본 사안과 같은 익명적 온라인공간에서는 다른 이들의 글들에 대해 보다 자유롭게 대응할 수 있다. 악성댓글도 얼마든 지 남길 수 있다. 다른 커뮤니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이용자는 또 하나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익명의 사람들에게 ‘인정’과 ‘지지’를 받고자 한다. 페이스북에 올리지 않고 익명적 온라인공간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자신의 글의 내용이 사회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본 사안의 닉네임 ‘□□’ 역시 소비행태가 사회적, 윤리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운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사안의 설명에 보면 이 이용자는 학생으로 파악되고 있는 데, 치열한 경쟁 속에 많은 한국인들이 사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밀려나는 경험을 하고 있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은 그 정점의 경험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크다고 볼 수 있다. 닉네임 ‘□□’의 지속적인 소비행태 자랑 글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편, 익명적 온라인공간에서 다른 이용자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글들의 특징은 읽은 이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이용자들에게 상대적 우월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여행에서 고생하는 이야기, 연애에서 실패한 이야기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하고 즐거운 경험을 한 이야기, 다른 이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것을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다른 이용자들에게 질투심을 유발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미 다른 이들이 자신보다 잘나 보이는 것을 견디기 힘든 한국사회성원들의 특징을 볼 때, 온라인공간에서 ‘잘난 척’하는 이용자는 집단적 공격의 대상이 된다. ‘관심종자’ 등으로 비하하면서 악성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집단적 공격은 먼저 그 ‘관심종자’ 이용자가 현실에서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불법적 방법이 동원된다. 온라인공간이 아무리 익명적 공간이라고 해도 소셜미디어, IP주소 등의 해킹을 통해 여러 연결고리를 맞추면서 결국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내버린다. 그리고 현실공간에서 그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이인가를 밝혀내서 온라인공간에서의 ‘멋진 정체성’은 모두 허구라는 것으로 비하하고 집단적 만족감을 얻게 된다.

 

한편 익명의 이용자들로부터 집단적 공격을 받는 이는 자신의 원래 목적인 익명의 이용자들로부터의 지지와 완전히 상반되는 반응으로 인해 더욱 실망하고 분노한다. 특히 자신이 ‘루저’로 표현되며 인신공격을 당하는 것이 대해 분노해서 처음에는 이에 대응을 하지만 대응을 할수록 더욱 집단적 공격이 확대되는 것을 경험한다. 결국 이러한 집단적 공격에 당해낼 수 없는 판단이 서게 되며, 이에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감에 사로잡힌다. 또한 반복적인 악성 댓글들을 읽으면서 자신이 실제로 열등한 존재는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는 현실공간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자신감마저 상실할 위험에 처하게 한다. ‘언어’는 상호관계의 기본적인 수단인데, 단어와 문법에 따라 상대방에게 심리적 폭력을 가하게 된다. 악성 댓글로 인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연예인들 역시 이 심리적 폭력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는 이용자는 자신에게 심리적 폭력을 가하고 있는 익명의 이용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된다. 연예인들은 실명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악성댓글을 단 이용자들에게 명예훼손 고소 등으로 대응을 한다. 이는 복수를 공적권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실명의 개인이 행하는 익명의 군중에 대한 복수 구도와 익명의 개인이 행하는 익명의 군중에 대한 복수의 구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실명의 연예인은 경찰과 같은 공권력을 통해 익명의 군중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가 쉽지만, 자신 역시 실명이 아닌 익명, 혹은 닉네임과 같은 가상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이용자의 경우 익명의 군중에 대해 대응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본건의 경우 닉네임이 있지만, 그 닉네임이 그 본인의 실제 정체성과 어느 정도 일치가 되는 가의 문제가 핵심인 것이다. 이는 본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정책위원회에서 언급한 ‘특정성’의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위원회에서는 닉네임으로 특정성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 요청자의 ‘닉네임 언급 관련 게시글 중단’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온라인공간의 정체성의 익명성이 어떤 의미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먼저 근대의 시기까지 개인은 사회와 제도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성, 가족에서의 역할, 사회에서의 역할들로 구성된 현실공간에서의 정체성은 대단히 고정적인 정체성이었다. 성전환 수술에 대한 터부시도 대단히 강했으며, 비단 수술이 아니더라도 남자는 남자처럼, 여자는 여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에 개인이 순종해왔다. 가족에서 남편, 아내, 부모, 자녀의 역할 역시 그 개인의 고정된 정체성이었다. 이는 근대에서 비대화된 구조의 권력으로 인해 개인이 위축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고정된 정체성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이름’이다. 모든 개인은 1개의 실명만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다. 여권, 신분증 등에 자신의 본명이 적혀 있어야 한다. 제도적으로 1개의 실명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Deleuze)에 의하면 근대사회부터 강조되어온 ‘고정된 정체성’은 개인의 삶에서 다양성을 앗아가고 자유를 상실시켜 결국 개인을 피폐하게 만든다. 고정된 정체성은 개인에게는 죽음과 다름없다. 개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여받은 정체성 안에서 머물면서 결국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지 못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개인의 정체성을 본질적으로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유동적인 것이다. 야누스의 모습, 지킬과 하이드에서 나타나는 이중적인 정체성에 대해 하나의 정체성은 옳고, 다른 하나의 정체성은 틀리다는 시각은 근대가 개인에게 강요한 이분법적인 구조제약이다. 개인은 이러한 이분법적 정체성 구조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푸코(Foucault) 역시 근대는 개인의 생각과 행위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면서 개인을 억압하였다고 비판한 바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이 아닌 다른 정체성을 찾을 때 개인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실험은 정보사회에 들어와 온라인공간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실험은 닉네임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현실공간에서와는 다른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다른 정체성은 현실공간의 나의 정체성과 다를 뿐이지, 나의 본연의 정체성의 일부이다. 현실공간에서 발현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나의 욕구, 욕망이 현실공간에서 구현되면 발생하게 될 위험들을 감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윤리적, 제도적 제약이 느슨한 온라인공간에 그 욕구와 욕망들이 새로운 닉네임 기반 정체성을 통해 나타난다. 남성이 여성의 정체성으로 변신하기도 하며, 기혼자가 미혼자로 변신하기도 한다. 성 정체성, 가족내의 정체성의 변화는 현실공간에서 윤리적 비난이 대상이 되지만 온라인공간에서 이러한 비난이 불가능하다. 실제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서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내부에 그 새로운 정체성을 발현하고 싶은 욕구는 가득하다.

 

익명인 ‘oo’이 아닌 ‘□□’이라는 닉네임은 이 새로운 정체성을 발현하고자 하는 이용자의 욕구가 상대적으로 강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ㅇㅇ’ 뒤에 숨어서 글들을 올렸을 것이다. 이용자는 닉네임 ‘□□’의 소비행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일정 부분 즐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던 만큼 집단적 공격에 더욱 실망하고 분노한 것이다. 이러한 소위 ‘고닉’ 이용자는 그 아이디가 자신이라고 믿는다. 온라인공간에서 그 아이디를 가지고 여러 글을 올리고 이를 기반으로 다른 이용자들과 소통한다. 때로는 지지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데 모두 현실공간보다는 훨씬 더 나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것 사실에 스스로 흥분한다. 본 사안에서 당사자 이용자는 자신의 닉네임과 현실공간의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수준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현실공간에서 자신의 실명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보다 온라인공간에서 닉네임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 이용자는 닉네임과 자신의 현실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정도가 대단히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적 공격에 대해 피해의식과 복수심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온라인공간의 닉네임과 같은 가상아이디는 현실공간의 실제 정체성과 연결되 어 있긴 하지만 나의 실제의 정체성 그 자체는 아니다. 개인은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을 또 다른 닉네임으로 얼마든지 발현할 수 있다. 이는 현실의 실명을 기반으로 하는 정체성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과는 다르다. 본 사안의 경우 닉네임 ‘□□’을 사용한 이용자는 ‘□□’이라는 닉네임을 포기하고, 새로운 닉네임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 지 있다. 그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은 ‘□□’이라는 닉네임 1개가 아니라 또 다른 다양한 닉네임으로 발현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닉네임언급에 대한 게시중단 요청’에 대해 이를 받아들지 않은 KISO의 결정은 “온라인공간에서의 닉네임과 같은 가상적 정체성은 현실 정체성의 ‘일부’ 일뿐, 그 현실 정체성 자체가 아닌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정체성일 뿐인 점을 인식‘ 한 정당한 결정이라고 본다.

저자 : 최항섭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