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GF의 설립 배경과 의미, 역할
한국의 인터넷 규제 정책을 흔히 ‘갈라파고스 규제’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대륙과 동떨어진 갈라파고스 섬과 달리, 한국의 인터넷은 전 세계 네트워크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은 각 국가의 사이버 국경의 집합이 아니며, 세계적으로 연결되는 속성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물론 각 국가마다 문화나 사회 상황이 다르고, 정부는 각 국 내에서 공공성과 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국가적 차원의 인터넷거버넌스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인터넷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갈라파고스적 규제는 글로벌 인터넷의 속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유튜브가 인터넷 실명제 규제를 우회한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터넷 거버넌스 (Internet Governance)
인터넷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규칙’이 필요하다. 우선 IP 주소와 도메인 네임, 그리고 기술적 프로토콜과 같이, 전 세계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네트워크로서 인터넷이 작동하기 위한 기술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또한 인터넷이 우리 삶과 사회의 일부가 되면서, 스팸, 보안, 저작권 등 인터넷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와 같이 인터넷의 안정적인 운영, 이용과 관련된 공공정책의 결정, 그리고 그러한 정책의 원칙들과 정책결정 과정 등을 ‘인터넷 거버넌스(Internet governance)’라고 한다. 이를 거버먼트(government)가 아니고 거버넌스(governance)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정부의 책임과 역할만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참여자들 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코드는 법’이라고 한 로렌스 레식의 논리에 따르면, 초기 인터넷의 프로토콜을 정해온 엔지니어들이 인터넷이 작동하는 법을 만든 셈이다. 한국이 .kr 이라는 국가 도메인을 갖게 된 것이 유엔(UN)에서 정부 간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술 표준뿐만 아니라, 규범도 중요하다. 예컨대, 인터넷 보안과 관련하여 기업의 기술적 조치나 정부의 규제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보안을 위한 이용자의 행동지침 같은 것도 필요하다. 아동포르노와 같은 콘텐츠를 규제하기 위해 공공기관, 민간단체, 인터넷기업 등의 협력에 기반한 자율규제 시스템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인터넷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법이나 공적 규제뿐만 아니라, 기술표준, 시장, 규범과 같은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정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참여자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협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인터넷거버넌스 모델을 멀티스테이크홀더(multi-stakeholder) 모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개념은 ‘공공정책의 수립과 집행은 정부의 책임’이라는 전통적인 인식과는 확실히 괴리가 있다. 또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이 무엇인지 확정된 것은 아니며, 계속 새로운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인터넷 거버넌스를 둘러싼 논쟁은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이 무엇인지, 여기서 정부와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책임과 역할은 무엇인지, 이에 기반한 세계 인터넷거버넌스의 제도화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세계적 수준에서 인터넷 거버넌스의 문제가 이슈화된 것은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정보사회세계정상회의(World Summit on the Information Society, 이하 WSIS)에서이다. 애초에 WSIS는 ‘개발(development)’과 ‘접근(access)’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IP 주소, 도메인 네임 등 주소자원에 대한 미국 정부의 독점적 권한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면서 인터넷거버넌스 논쟁이 점화된 것이다. 1998년 만들어진 ‘인터넷주소관리기구(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 이하 ICANN)’는 주소자원과 관련한 세계적 조정을 위한 민간기구이지만, 미국 법 하에 만들어진 비영리 민간단체의 형식을 갖고 있었고, 루트 서버에 대한 최종 감독 권한 역시 미국 정부에 있었다. (2014년 3월, 미국 정부는 루트 서버에 대한 감독 권한을 이양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03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1차 WSIS 이후에 ‘인터넷 거버넌스 워킹그룹(Working Group on Internet Governance, 이하 WGIG)’이 만들어졌는데, WGIG의 최종 보고서1 가 2005년 2차 WSIS에 제출되었고, 2차 WSIS의 최종 결과물인 튀니스 어젠더(Tunis Agenda)2 에 그 내용이 상당부분 반영되었다. 결국 주소자원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권한에 대한 논란은 2차 WSIS에서 해결되지 못했지만, 튀니스 어젠더는 인터넷거버넌스에 대한 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공간으로서 인터넷거버넌스포럼(Internet Governance Forum, 이하 IGF)3 을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튀니스 어젠더 72항)
IGF는 인터넷과 관련한 제반 이슈에 대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멀티스테이크홀더) 사이의 정책 대화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2006년 아테네에서 1차 포럼이 개최되었으며, 2014년 9월 2일-5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9차 포럼이 개최되었다. 또한, 그 취지를 이어받아 각 지역 및 국가 차원에서의 IGF도 개최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2010년 홍콩 아태지역 IGF를 시작으로, 지난 2013년에는 서울에서 4차 아태지역 IGF가 개최되었다. 러시아, 독일, 캐나다, 케냐, 말레이시아 등 각 국에서도 국가 차원의 IGF를 개최하고 있다. 세계 IGF가 유엔이 주최하는 행사인 반면, 지역 및 국가 차원의 IGF는 이해관계자들의 자발적인 조직화에 의해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 IGF 역시 지역별, 국가별 IGF를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등록할 수 있도록 하여, 그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지역, 국가 단위의 IGF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간 정책 토론과 역량 강화라는 IGF의 의미를 각 지역, 국가 단위로 확대하고, 각 국가나 지역의 고유한 이슈를 발굴하며, 이를 세계 IGF와 연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IGF의 역할과 유의미성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개발도상국 정부들과 시민사회는 IGF가 단순히 ‘토크쇼’가 아니라, 무언가 구체적인 결과물을 생산할 것을 주장해왔다. 반면, IGF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간 대화를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히고, 정보화와 관련된 새로운 이슈들이 제기되며, 좋은 사례(Best Practice)들이 공유되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여하튼 9차에 걸친 포럼이 진행되면서 인터넷거버넌스 지형에서 IGF가 차지하는 위상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14년 4월 23-24일 상파울루에서 개최된 넷문디알 회의(인터넷 거버넌스의 미래에 대한 멀티스테이크홀더 회의)에서도 IGF의 강화 필요성을 권고한 바 있다.
넷문디알 선언문은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합의한 최초의 선언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정부, 시민사회, 업계, 학계 및 기술계 등 다양한 참여자들이 ‘동등하게’ 참여하여, 대략적 합의(rough consensus)를 통해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ICANN 역시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에 기반하고 있지만 민간 주도적이고 정부는 자문위원회의 위상을 갖고 있다. 1차 WSIS 이후 만들어진 WGIG는 정부 주도적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이라고 할 수 있으며, IGF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보장하지만 구체적인 결과물을 산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 자체가 아직 실험적인 단계인데, 이를 단지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논의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넷문디알 선언문4 은 인터넷거버넌스 절차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데, 모든 이해관계자의 ‘의미 있고 책임 있는 참여’를 보장해야 하고, 개방적이고 참여적이며 합의 기반의 거버넌스일 것, 모든 절차는 문서화되어야 하며 이해관계자에 의해 합의된 절차일 것, 평가와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책임성(accountability) 구조를 가질 것, 모든 관련 이해관계자를 포함하는 아래로부터의 의사결정 과정(bottom-up)이어야 하며, 이해관계자 그룹의 공정성을 보장할 것, 새로운 참여자나 취약그룹의 ‘의미 있는’ 참여를 보장할 것 등이다. 이런 점에서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은 기존의 ‘대의적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하나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기존 한국의 정책결정 과정을 보면, 정부가 자문위원회 등의 형태를 통해 나름대로 민간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협의를 하거나, 공청회, 입법예고 등을 통해 의견수렴을 하곤 한다. 그러나 위의 거버넌스 원칙에 비추어보면, 참여자들의 자의적인 선정, 위원회 운영의 불투명성, 정책 결정 과정의 비공개 등 많은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멀티스테이크홀더라는 특정한 모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민주적인 정책 결정을 위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지난 2014년 7월 4일, 은행권청년창업재단 D.CAMP 6층 다목적홀에서는 “참여와 협력을 통한 인터넷거버넌스”라는 주제로, 제1회 한국 인터넷거버넌스포럼(한국 IGF)5 이 개최되었다. 개회식과 기조강연, 그리고 3개의 워크샵으로 구성된 한국 IGF 행사는 언뜻 보면 통상의 토론 행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행사는 준비 과정에서부터, 정부, 시민사회, 업계, 학계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기획하고 준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동안의 다른 행사들은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패널로 초청을 하기는 하지만, 주로 특정 이해관계자 그룹이 주최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슬로건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한국 IGF는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대화와 협력을 모색해보자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 IGF가 하나의 이벤트에 그친다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국내적 차원의 인터넷거버넌스를 보다 발전시키고, 세계 인터넷거버넌스에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정부가 넷문디알 회의 참여 이후, 국내에서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에 기반한 인터넷거버넌스 기구(현재 ‘다자간인터넷거버넌스협의회(KIGA)’라는 이름의 기구의 형성을 논의 중에 있다) 형성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국내 인터넷거버넌스 기구가 인터넷 공공정책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의 성공은 단지 정부의 자세와 의지에만 달려있지 않다. 이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들 역시, 지금까지의 관성대로 정부에 대한 자문위원이나 민원인의 입장이 아니라, 정책 형성의 주체로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 Report from the Working Group on Internet Governance(2005), available: http://www.itu.int/wsis/documents/doc_multi.asp?lang=en&id=1695|0 [본문으로]
- Tunis Agenda for the Information Society(2005), available: http://www.itu.int/wsis/documents/doc_multi.asp?lang=en&id=2267|0 [본문으로]
- available: http://www.intgovforum.org/ [본문으로]
- NETmundial Multistakeholder Statement (2014), available: http://netmundial.br/netmundial-multistakeholder-statement/ [본문으로]
- available: http://www.igf.or.kr/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