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없음』: 질서 없음을 낳는 질서의 역설을 향한 통찰

1. 현재 진행형의 위기를 읽는 법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천연가스 수입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하던 EU에서는 가스 값 폭등이 일어났다. 가장 큰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1에 폭발사고까지 일어나면서 가격 폭등은 절정에 달했다. 유럽 각국 정부는 가계 지원금을 쏟아 부었다. 같은 해 한국에서는 한전의 연간 영업 손실이 무려 32조 6,500억 원에 달했고, 전기요금 인상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 갈등으로 확산됐다. 당시 여당이던 국민의힘은 전임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짓지 못한 탓이라고 비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러-우 전쟁이라는 근본 원인을 외면하고 국제 요인까지 정쟁화한다며 맞섰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따로따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쟁, 에너지 가격, 정치 양극화가 서로 얼마나 깊숙이 얽혀 있는지 보여준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다시 당선되고, 유럽 각국에서 극우 정당의 약진이 이어지는 지금, 이 모든 사건들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는 진단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브렉시트, 트럼프의 부상, 극우의발호, 유로존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2. 책 속으로
케임브리지대학 정치경제학 교수 헬렌 톰슨은 『질서 없음』(원제 Disorder: Hard Times in the 21st Century, 2022)에서 이 복잡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는 에너지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지정학의 역사, 2부는 화폐·금융·에너지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제의 역사, 그리고 3부는 민주정 국가의 정치사로 이뤄진다.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간명하되 묵직하다. 오늘날의 ‘질서 없음’은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경제 통합,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 시스템이 각각 질서를 만들면서 동시에 다음 무질서의 씨앗을 심어온 결과라는 것이다. 질서를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그 자체가 질서없음의 기원이 된다. 이 딜레마를 직시할 때 우리는 좀 더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조언이다.
1) 석유와 지정학
저자는 석유와 가스가 21세기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라고 주장한다. 20세기 초에 석유는 군사력과 경제력의 핵심 자원으로 부상했고, 미국은 풍부한 석유와 자본을 바탕으로 패권국이됐다. 1956년의 수에즈 위기는 영국의 중동 지배력을 끝냈고, 미국은 그 공백을 직접 메우는 대신 사우디·이란을 통해 관리했다. 미국의 석유 생산은 1970년에 정점에 이른 후 감소하면서 서구에 대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반면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게 된 소련의 에너지 권력은 성장했다. 닉슨과 키신저가 소련과의 데탕트에 나선 배경이다. 이후 셰일혁명에 따라 미국의 중동 의존도는 줄었지만, 대신 러시아·사우디와의 에너지 경쟁이라는 새로운 불안정이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지정학적 단층선들이 유럽 내부의 분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노르트스트림을 둘러싼 독일과 동유럽·남유럽의 갈등, 동지중해 가스를 둘러싼 프랑스-튀르키예의 충돌,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용한 튀르키예의 EU 가입 문제, EU와 NATO의 불일치 문제까지 에너지는 표면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을 잇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2) 화폐와 금융, 그리고 차이메리카의 붕괴
2부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형성과 붕괴, 유로존의 탄생과 위기, 미중 통화 갈등을 다룬다. 1960년대부터 유로달러 시장(역외 달러 시장)이 확대되며 달러 신용이 미국 통제 밖에서 팽창했다. 미국은 1971년 금태환 중지와 1973년 고정환율제 폐지로 대응했고 브레턴우즈 체제는 붕괴했다. 세계는 전대미문의 법정 불태환 화폐 시대로 접어들었다. 오일쇼크에 따른 무역적자 증가에 미국은 사우디와 페트로달러 합의(미 국채 매입과 군사지원의 교환)로 대응했고, 이 통화 환경은 공공·민간 부채의 폭발적 증가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신자유주의의 부상도 순수한 이데올로기의 승리라기 보다는, 석유 수입 대금 수요가 폭증한 상황에서 자본 이동 규제를 철폐하고 달러에 쉽게 접근해야 할 필요와 결합한 것이었다.
유로존은 독일이 원한 소규모 통화 강국 클럽이 아니라 남유럽을 포함한 대규모 연합으로 구조적 결함을 안은 채 출범했고, 영국은 1992년 유럽환율메커니즘 탈퇴로 통화연맹과 멀어지며 브렉시트로 이어지는 경로를 열었다. 2000년대에 들어 중국의 고속 성장과 달러 고정환율제도 유지, 차이메리카 공생 구조는 겉으로는 ‘대안정기’를 연출했지만 실제로는 불안정성이 축적되고 있었다. 2007~2008년의 위기는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주택시장·레포시장·유로존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다중 붕괴’였으며, 연준은 달러 스와프로 사실상 글로벌 최종대부자가 되었다. 2009~2012년의 유로존 위기에서 유럽중앙은행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상의 제약으로 회원국의 부채 위기에 직접 개입할 수 없었고, 그 결과 그리스·이탈리아에서는 선출된 정치인 대신 기술관료가 경제를 운용하는 민주주의의 공동화가 나타났다. 2015~2016년의 금융 불안 동안 중국은 달러 의존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인민폐 국제화 시도는 오히려 더 깊은 달러 의존이라는 역설을 낳았다. 주식시장 폭락, 미 국채 패닉 매도 등 2020년 3월의 붕괴는 이 세 위기가 압축 재현된 것으로 연준은 무제한 양적완화로 대응해야 했다. 결국 브레턴우즈 붕괴 이후 형성 된 달러 중심 신용 체제가 유럽 통화 갈등, 미중 무역 전쟁, 반복되는 금융 위기를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관통하며, 저자는 오늘날 정치적 격동의 경제적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3) 민주정과 시간
3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선거 제도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자신을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하나의 경제적 운명공동체로 인식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라고 부른다. 전간기 유럽의 민주주의가 쉽게 무너진 이유는 바로 이 의식이 약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의 뉴딜은 단순한 경기 부양정책이 아니라, 국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제시한 정치적 프로젝트였다. 전후 서유럽 복지국가들도 이 모델을 발전시켰다.
1970년대의 석유위기,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금융화·유럽통합은 이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를 해체시켰다. 정책 결정의 상당 부분이 국민국가 밖의 규칙 체계(EU, 유로존, 국제시장)로 옮겨갔고, 그 결과 민주주의는 살아있지만 정책을 바꿀 능력은 약화되었다. 브렉시트, 트럼프의 당선, 유럽의 포퓰리즘 대두는 근본적으로 이 ‘통제권 상실감’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3. 책이 전해주는 통찰과 남는 질문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곧잘 따로 다뤄지는 세 가지 영역 — 지정학, 화폐·금융, 민주정치 —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낸다는 점이다. 브렉시트를 영국 국내 정치의 문제로, 트럼프 현상을 미국 문화전쟁의 문제로, 유로존 위기를 남유럽 재정 문제로 접근하는 통상적인 방식과 달리,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역외 달러 시장의 팽창과 에너지 위기라는 근본 원인과 결합한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의 해체’라는 구조적 변화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열역학 제2법칙에서 빌려온 ‘정치적 엔트로피’ 개념도 신선하다. 저자는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려는 시도가 필연적으로 미래 무질서의 씨앗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달러 중심의 안정적 국제 통화 질서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통제 불가능한 유로달러 시장의 팽창을 낳았다. EU와 유로존은 전쟁을 막고 민주주의를 안정시키려는 프로젝트였지만, 통합이 심화될수록 각국 민주주의 정부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새로운 무질서를 만들어냈다. 셰일혁명은 미국의 에너지 자립을 가능케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사우디와의 에너지 경쟁이라는 새로운 불안정을 낳았다. 질서의 노력이 무질서의 씨앗을 심는다는 역설은, 오늘날의 혼란이 누군가의 실수나 악의의 결과가 아니라 정치 질서의 본질적 속성에서 비롯됨을 시사한다.
다만 이 통찰은 동시에 이 책의 한계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정치적 엔트로피가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과제로 제시하지만, 그 주체와 경로는 모호하다. 엔트로피에 맞서 질서를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에너지 투입이 필요하듯,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데도 구체적인 정치적 행위와 제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또한 저자는 트럼프와 바이든 사이의 연속성 — 산업정책과 국가전략으로의 회귀 — 을 강조하지만 이런 회귀가 과연 민주주의적 정당성의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보호주의와 산업정책이 강화된다고 해도 누가 혜택을 받고 누가 배제되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전환에 대한 저자의 신중한 태도 역시 질문을 부른다. 화석연료 지정학이 리튬·희토류 지정학으로 형태만 바뀐다면, 에너지 전환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과 갈등을 낳을 위험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 또한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질서 없음』은 21세기 이후의 혼란스러운 사건들을 하나로 꿰어 보여주는 통찰을 제공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후기의 마지막 장면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정치적 갈등을 막아줄 것이라는 냉전 이후의 낙관론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과제는 시민적 정당성과 정치적 통제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있다는 저자의 결론은 오늘날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문제는 다시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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