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폭발시대.”
한국의 스타트업생태계를 활성화시키고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는다는 미션으로 출발한 스타트업 얼라이언스를 맡은 지도 벌써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물론 미국, 일본, 중국, 싱가포르, 이스라엘, 영국 등지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정말 전 세계적으로 ‘스타트업폭발시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한국정부가 ‘창조경제’라는 테마로 열심히 스타트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런 모습은 다른 나라 정부도 다르지 않다. 각국의 정부관계자들은 모두 신경제를 이끌 성장 동력으로 스타트업이 가진 파괴력에 주목하고 자국에 스타트업생태계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세계 각지의 똑똑한 젊은이들은 스타트업을 ‘쿨(Cool)’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스타트업에서 세계적인 공룡기업으로 성장한 실리콘밸리의 구글, 페이스북 같은 업체들은 실력 있는 스타트업들을 거액에 사들이면서 이런 창업자들에게 대박신화를 안겨준다.
영국의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월 ‘캄브리안 모우먼트'(Cambrian Moment)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5억4천만 년 전에 지구상에 캄브리아기의 폭발이 일어나 다양한 생명체가 급속히 증가했던 것처럼 지금 전 세계에 스타트업들이 급속히 증가해 산업 전체를 재편하고 있으며 기업의 개념도 바꾸어 놓고 있다는 내용이다. 실리콘밸리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유명 대도시들에 벤처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수많은 스타트업들의 보금자리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의 스타트업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가히 스타트업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 실리콘밸리다. 세계IT업계의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북쪽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산호세까지 샌프란시스코 만을 따라 80km쯤 이어지는 지역이다. 예전에는 애플, 구글, 페이스북, HP 등의 본사가 있는 팔로알토, 마운틴뷰 등 남쪽 지역에 스타트업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스타트업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북상중이다.
지난 9월 한국의 스타트업을 실리콘밸리투자자들에게 소개시키는 ‘비글로벌2014’ 행사 개최를 위해서 가본 샌프란시스코는 마치 160년 전의 골드러시가 다시 재현된 느낌이었다. 스타트업으로 대박을 내는 꿈을 가진 인재가 전 세계에서 몰려들고 있고 빌딩마다 이런 스타트업을 키우는 인큐베이터나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공동협업공간)가 성업 중이었다. 작은 책상 공간 하나에 월 임대료가 7~8백 불 하는데도 불구하고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있는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슬럼가로 분류되어 노숙자들이 진을 치고 있던 샌프란시스코의 변두리지역에 트위터나 에어비앤비, 우버 같은 급성장하는 스타트업이 들어오면서 집값이 오르고 새로운 레스토랑, 상점 등이 들어오는 등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거의 정부의 지원 없이 돌아가는 스타트업생태계를 가진 곳이다. 유망한 스타트업에게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된 경험 많은 엔젤투자자나 벤처캐피털회사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스탠포드, UC버클리 등 그 지역 명문대출신의 인재는 물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천재들이 스타트업을 만들어 엔젤이나 VC들에게 투자를 받는다. 경쟁이 치열하기는 하지만 기술이나 사업모델만 증명할 수 있다면 성장단계별로 수억에서 수천억 원에 이르는 자금을 지원해줄 민간VC들과 대기업계열 벤처펀드가 줄을 서있다. 회사를 키우는데 필요한 세계최고급의 실력을 지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인적자원도 풍부하다.
성장가능성이 검증된 유명 스타트업에는 VC로부터의 투자문의는 물론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대기업의 매수나 투자 관련된 구애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스타트업의 성장과정에서 경험 많은 선배 창업자들이 후배들에게 조언과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는 문화가 있다. 이런 선순환 생태계가 실리콘밸리를 전 세계 스타트업의 블랙홀처럼 만든 것이다. 이런 선순환 생태계 덕분에도 당분간은 계속 실리콘밸리가 전 세계의 IT혁신을 주도해갈 것이다.
최근 200조가 넘는 시가총액으로 뉴욕증시에 성공적으로 상장한 알리바바의 사례에서 보듯 TAB(텐센트, 알리바바, 바이두)로 대표되는 중국의 인터넷대기업들은 미국 글로벌 기업들과 글로벌 인터넷 양강체제를 이루게 됐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중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도 실리콘밸리 못지않게 뜨겁고 활발하다. 중국의 IT업계를 경험한 이들은 “딜 규모면에서 실리콘밸리를 능가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모바일인터넷붐이다. 중국은 이미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터넷사용자를 가진 시장이지만 스마트폰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모바일인터넷이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다. 따라서 모바일비즈니스를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들에게 큰 기회가 생겼다. 둘째 해외기업진입이 어려운 중국인터넷시장에는 현지 스타트업을 위한 기회가 더 크다.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실리콘밸리의 인터넷기업들이 중국에서 완벽하게 차단되면서 해외스타트업조차 중국에 들어가기 힘들어졌다.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회사들의 빈자리를 비슷한 서비스를 내세운 중국스타트업들이 차지하게 됐다. 셋째,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TAB기업들의 인수합병활동이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등 중국의 인터넷대기업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수백~수천억, 심지어는 조 단위에 이르는 인수를 하거나 투자에 나서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중국의 젊은 창업가들이 백만장자가 되서 다시 스타트업 투자에 나서고 있다. 또 이런 기회를 보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일하던 중국인재들이 중국으로 회귀하면서 중국스타트업의 수준도 미국 못지않게 높아지고 있다.
이런 창업과 투자의 선순환이 시작되면서 중국스타트업의 부상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텐센트 등은 이미 한국VC의 펀드참여를 통해 간접적으로 한국온라인게임업체에 투자를 하고 있기도 하고 카카오의 대주주 중 하나로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중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부상을 우리도 눈 여겨봐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창업국가’(Startup Nation)로 잘 알려진 이스라엘은 스타트업 강국이다. 인구 1인당 스타트업숫자가 가장 많으며 상업도시인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활발한 스타트업생태계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내가 느끼기에 가장 실리콘밸리와 비슷한 스타트업문화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이민 와서 만들어진 나라답게 이스라엘스타트업멤버들의 면면도 다국적이다. 미국출신, 러시아출신, 아르헨티나출신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유대인들이 팀을 이루기 때문에 사고자체가 처음부터 글로벌하다. 인구가 겨우 8백만밖에 안 되는 소국이기 때문에 국내시장은 모두 안중에도 없고 미국이나 유럽시장을 공략할 궁리부터 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은 ‘창업국가 이스라엘 배우기’가 한창이다.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에서 만난 현지 스타트업관계자들은 “한국처럼 잘 살고 삼성, 현대 등의 세계적인 대기업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왜 우리를 부러워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이스라엘스타트업은 커지면 대부분 미국대기업에 비싼 값으로 팔려 나갈 뿐 글로벌한 브랜드를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은 런던의 동쪽지역인 이스트런던을 전략적으로 ‘테크시티'(Tech City)라고 이름 짓고 유럽의 스타트업허브로 집중육성하고 있다. 원래 옛날 공장이나 창고 건물로 가득 차 있어 런던 중심지역에 비해 그다지 발전이 없던 지역인데 2008년부터 10여개의 테크기업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고 2010년 데이빗 카메론총리가 이 지역을 테크허브로 키우겠다고 천명하면서부터 스타트업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국 투자청에 따르면 현재 이 지역에는 1천3백여 개의 스타트업이 활동하고 있다.
영국은 이곳을 ‘유럽진출의 전진기지’로서 활용하라고 세계 각국의 창업자들에게 손짓하고 있다. 일단 영어가 통하고 금융의 중심지인데다 유럽의 관문이라는 설명이다. 또 금융 중심지로서 런던의 강점을 살린 핀테크(Fintech-금융과 기술의 합성어)스타트업을 키우는데 주력하는 것도 차별화 포인트다.
일본은 대기업중심의 보수적인 사회다. 토요타, 소니, 히다치, 미츠비시 같은 대기업들이 경제를 이끌어왔고 부모들과 젊은이들은 작은 회사에 가는 것보다 고용이 안정적인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압도적으로 선호해왔다. 명문대를 나와서 벤처기업에 간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일본도 최근엔 변하고 있다. 장기 경제 불황에 평생고용신화는 사라지고 있으며 인구는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부 충격도 있다. 일본전자회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일본국내휴대폰시장도 ‘아이폰 공습’으로 초토화됐다. 네이버의 일본자회사인 라인주식회사에서 내놓은 라인메신저는 일본인들의 생활패턴을 바꾸면서 일본 IT업계의 지형도도 바꾸고 있다.
이런 파괴적인 디지털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존 일본대기업들은 스타트업의 혁신성에 주목하고 있다. 사이버에이전트, GREE, DENA 등 많은 인터넷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시작한데 이어 일본최대의 광고대행사 덴츠, TV방송국 후지테레비 등 미디어대기업들도 벤처펀드를 만들어 스타트업투자에 나섰다.
이처럼 스타트업투자열기가 후끈해지면서 일본 스타트업의 몸값도 올라가고 있다. 뉴스를 개인취향에 맞게 골라서 보여주는 모바일 앱을 만드는 ‘구노시(Gunosy)’라는 스타트업은 앱 다운로드가 2백만 회도 안 되는 상태에서 1천억 원 가까운 기업 가치로 120억 원 정도를 투자받아 큰 화제가 됐을 정도다.
그럼 한국의 스타트업생태계는 어떨까. 내가 IT업계담당 신문기자로 일하던 90년대 중반부터 20년 가까이 한국의 IT업계를 지켜봐왔지만 지금처럼 스타트업열기가 뜨거웠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2000년의 닷컴버블기보다도 좋은 스타트업이 더 많이 나오고 잘 성장하고 있다.
지금은 스타트업을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다. 우선 ‘창조경제’를 슬로건으로 한 현 정부가 수많은 창업지원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민간투자자들의 투자에 정부가 ‘매칭’방식으로 지원해주는 TIPS(중소기업청)같은 프로그램도 있다. 그리고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디캠프, 마루180, 드림엔터 등 스타트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보를 나누고 팀을 구성할 수 있는 많은 장소가 생기고 있다. 심지어 구글도 스타트업을 위한 공간인 ‘캠퍼스 서울’을 내년 초에 오픈할 예정이다.
2000년과 비교하면 지금 한국의 스타트업 열기에는 몇 가지 긍정적인 신호가 있다. 우선 생태계의 선순환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스타트업 초기단계 투자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스타트업 성공경험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엔젤투자자로 활동하거나 벤처캐피털, 혹은 액셀러레이터를 만드는 것이다. 프라이머의 이택경 대표(다음 공동창업자), 권도균 대표(이니시스 창업자), 본엔젤스의 장병규 대표(네오위즈, 첫눈 공동창업자)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엔젤투자자, 멘토로 활동하면서 스타트업생태계를 비옥하게 하고 있다. 또 이들에 자극받아 서울공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등의 공대출신 인재들의 창업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좋은 신호다. 또 맥킨지, 베인앤컴퍼니 등 유명 컨설팅회사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는 인재이동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인재들이 만든 좋은 스타트업이 늘어나니 해외로부터의 투자나 인수합병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연쇄 창업자인 카이스트출신 노정석대표가 공동창업한 모바일트래픽 분석회사인 파이브락스가 일본의 VC인 글로벌 브레인에서 투자를 유치하고 실리콘밸리 회사인 탭조이에 약 4백억 원에 인수된 것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스타트업 얼라이언스는 이런 한국스타트업생태계의 선순환을 가속화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갈 예정이다. 올해 3월 실리콘밸리의 IT업계에서 활약하는 한인동포들을 초청해 한국의 스타트업커뮤니티에 연결하는 ‘실리콘밸리의 한국인’컨퍼런스를 가졌고, 7월에는 한국 스타트업 19팀을 일본의 투자자들에게 소개하는 ‘재팬부트캠프’행사를 가졌다. 9월에는 미래창조과학부, 인터넷진흥원, 비석세스와 공동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비글로벌2014’ 행사를 개최해 한국스타트업생태계를 실리콘밸리에 소개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런 활동이 한국스타트업생태계의 선순환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한국 스타트업 중에 계속해서 제 2의 네이버, 다음, 카카오, 라인 등이 탄생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