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방송 시장 구도 변화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닌 유료방송 시장
최근 미디어 시장의 최대 화두는 지상파 방송의 추락이다. 올해 지상파 방송 3사의 적자가 1000억 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때 2조 원을 상회했던 지상파 방송 연간 광고 매출이 1조5000억 원 아래로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 그야말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원인은 인터넷·모바일로 급속히 빠져나가고 있는 광고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양방향 온라인 매체들과 경쟁하기 힘들고 개인화되고 있는 미디어 소비 행태 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아날로그형 매체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디지털 광고가 전체 시장의 60%를 넘어선 상태에서 광고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유료방송이 안전지대에 놓여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인터넷·모바일 기반의 OTT 서비스들이 급성장하면서 방송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OTT 공세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넷플릭스(Netflix)나 아마존 플러스(Amazon Plus)처럼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온라인을 통해 제공하는 유사 방송 플랫폼들과 유튜브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비전문적 인터넷 미디어들이다. 넷플릭스는 온라인 비디오 대여업자라는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1억2000만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성장은 주춤하지만, 남미나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여전히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아마존과 훌루(Hulu)까지 본격적으로 OTT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이들은 넷플릭스처럼 고품질 콘텐츠를 직접 제작 혹은 확보하면서 경쟁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한국 시장에서도 넷플릭스의 공세가 예사롭지 않다. 올 한해에만 가입자가 4배 이상 늘었다는 발표도 있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저가 유료방송시장에서 넷플릭스가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지상파 콘텐츠를 비롯한 국내 프로그램 공급만 봉쇄하면 스스로 퇴출할 것이라는 국내 방송 사업자들의 전략이 완전히 빗나간 셈이다.
하지만 유료방송시장을 가장 위협하고 있는 것은 유튜브에서 팽창하고 있는 인터넷 미디어들이다. 이미 많은 조사 결과에서 인터넷·모바일 이용 시간이 방송 시청 시간을 추월한 것으로 나타났고, 필수매체 인식도 전통 매체에서 인터넷·모바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 자릿수 시청률에 머무는 대부분의 유료방송 채널들보다 많은 구독자와 클릭 수를 확보한 유튜브 방송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지상파방송 하루 매출보다 큰 광고 수입을 올리는 여섯 살짜리 유튜버까지 있다. 더구나 일부 유튜버는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본격적인 인터넷 미디어로 성장하고 있다. 이에 기존 매체들까지도 고유의 송출 방식에서 벗어나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시청자 이탈이 지속한다면 저가 시장의 취약한 구조를 가진 우리 유료방송들도 곧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유료방송 시장의 탈출구 인수·합병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유료방송 사업자들이 선택한 전략은 인수·합병을 통한 몸짓 불리기인 것 같다. 올해 초 ‘LGU+’의 ‘CJ헬로비전’ 인수와 ‘SK브로드밴드’의 ‘티브로드’ 인수·합병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또한, 유료방송합산규제 후속 정책 혼란으로 애매한 입장이지만 유료방송 1위 사업자 ‘KT’도 ‘딜라이브’ 인수·합병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IPTV의 케이블TV 사냥’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료방송 시장이 포화상태를 넘어서면서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가입자를 늘리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규모의 경제에 크게 의존하는 미디어 사업의 특성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료방송 사업자 간 인수·합병은 전체 미디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승인 심사가 6개월 이상 지속하는 것도 어찌 보면 이런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우리 유료방송 시장은 주 재원을 홈쇼핑 송출 수수료 같은 B2B 수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료방송 플랫폼 사업자들 간의 인수합병은 많은 정책적 과제들을 유발할 수 있다.
물론 미디어 기업 간 인수·합병은 세계적 추세다. 디지털 융합으로 매체 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고착 효과’나 ‘네트워크 효과’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미디어 시장 역시 급속히 ‘승자독식’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2010년 이후 ‘Verizon’이 ‘AOL’, ‘Awesomeness’, ‘Yahoo’를 인수·합병하였고, ‘Time Warner Cable’ 인수에 실패했던 ‘Comcast’는 2014년에 ‘NBC Universal’과 ‘Dream Works’를 인수하였다. 지난 3월에는 2년 넘게 소송을 벌여왔던 ‘at&t’의 ‘Time Warner Cable’ 인수·합병도 법원에서 허용되었다. 또 최근에는 미국 법무부가 3, 4위 이동통신업체인 ‘t-mobile’과 ‘Sprint’ 간 합병도 조건부로 승인하였다.
이러한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의 인수·합병은 주로 플랫폼사업자들이 콘텐츠 사업을 내부화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유료방송 시장에서 추진되고 있는 인수·합병은 가입자 확대를 위한 플랫폼사업자들 간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의 인수·합병과는 큰 차이가 있다. 실제로 ‘LGU+’와 ‘SK브로드밴드’의 인수·합병 신청이 허용된다면 우리 유료방송 시장은 IPTV를 소유하고 있는 통신 사업자 3강 체제가 더욱 확고해지게 된다. ‘LGU+’는 844만, ‘SK브로드밴드’는 806만으로 선두 ‘kt’의 1070만 명에 이어 2, 3위 사업자로 자리 잡아 지금보다 더 치열한 가입자 경쟁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인수·합병의 성격
통상적으로 기업 간 인수합병은 ① 자산 재배치를 통한 이익 극대화 ②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를 통한 영업 시너지 제고 ③ 신규 사업자나 잠재적 경쟁자 제거 ④ 고객 및 원자재 공급에 있어 협상력 강화 ⑤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과 같은 목적에서 추진된다. 특히 수평적 인수합병은 기업 규모를 늘려 시장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지금 IPTV 사업자들의 케이블TV 인수합병 목적은 주로 ② ③ ④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IPTV 3사 중 가장 열위 사업자인 ‘LGU+’가 앞장서 인수합병을 추진한 이유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영업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업이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가입자를 늘려 수신료 수익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유료방송시장의 특성을 들여다보면 그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우리나라 유료방송 총가입자 수는 3195만으로 단체가입, 복수가입자 등을 고려하더라도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선 상태다. 이 같은 시장포화상태에서 이윤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상품의 질을 통한 선순환 경쟁’, ‘가격경쟁을 통해 경쟁사의 가입자를 전환하는 방법’, ‘인수·합병을 통해 경쟁사업자를 흡수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방법’ 등이 모색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 유료방송 시장 상황을 고려해 보면 앞의 두 방법은 비효율적인 것이 사실이다. 과포화 상태에서 경쟁 사업자의 가입자를 끌어온다는 것이 쉽지 않고 전환 비용도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 유료방송 시장은 모바일 결합상품을 축으로 강력한 ‘고착 현상(lock in)’이 작동하고 있다. 그 때문에 가장 용이한 방법은 경쟁사업자를 인수·합병하는 것이다. 최근 유료방송시장의 인수·합병 경쟁은 마치 2000년대 초반 케이블 SO의 ‘중계 유선방송 사들이기 경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보인다.
문제는 당시 중계 유선방송 인수합병 경쟁이 우리 유료방송 시장 저가 고착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 저가 경쟁의 지렛대가 인터넷 결합상품이었다면 지금은 모바일 폰을 축으로 하는 통신·방송 결합상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2000년 초반에는 지상파방송 재송신 대가 같은 지출 요인이 없었지만, 지금은 지상파방송 재송신 대가와 이를 보전할 수 있는 홈쇼핑 송출 수수료라는 간접 재원이 사업 중심에 있어 상황이 더욱 복합해졌다.
현재 우리 유료방송 플랫폼들의 생명줄은 시청 수수료가 아니라 홈쇼핑 송출 수수료다. 특히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은 홈쇼핑 송출 수수료가 영업이익의 200%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만약 인수·합병이 허용된다면 홈쇼핑 송출 수수료 의존도가 상대로 낮았던 IPTV마저 저가 가입자 확보 경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가입자 숫자에 비례해 수입이 결정되는 간접 재원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저가 경쟁을 가속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유료방송 시장에서의 인수·합병은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처럼 콘텐츠 내부화가 아니라 지상파방송 재송신 대가와 프로그램사용료, 그리고 홈쇼핑 송출 수수료 같은 연관 사업자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유료방송사들의 협상력(bargaining power) 제고에 목적을 두고 있다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콘텐츠를 통해 시장에서 경쟁하는 선순환 구조를 더 심각하게 황폐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료방송 시장 지각변동의 명과 암
이 같은 유료방송 시장에서의 지각변동은 연관시장인 지상파방송사나 콘텐츠 사업자들에게도 전략적 연대를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인수·합병 심사과정에서 모든 방송사업자가 이해득실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도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지상파 재송신 대가, 홈쇼핑 송출 수수료 등을 둘러싼 사업자 간 갈등이 더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개별 사업자 간 간헐적 갈등 양상을 벗어난 전면전 양상으로 확대되면서 ‘치킨 게임’이 끝없이 이어질 수도 있다. 물론 그 피해는 시청자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유료방송 시장에서의 인수·합병은 ‘지상파방송-플랫폼사업자-TV홈쇼핑 채널’ 같은 밸류체인 상의 모든 영역에 연쇄적 갈등으로 확산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법적 미비와 정책적 혼선으로 정부의 사업자 간 조정 능력이 사실상 결여된 상태에서 이 같은 우려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나비효과를 유발할 수 있는 유료방송 인수·합병 심사에 있어 정부의 치밀하고 다차원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하지만 지난 6개월간 정부의 인수·합병 심사과정을 보면 지나치게 양적 측면에서 시장지배력과 결합 판매에 미치는 효과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또 공정위 등은 인수·합병으로 강화된 시장지배력을 근간으로 유료방송 수신료를 인상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앞서 설명했던 우리 유료방송 시장의 특성을 고려하면, 인수·합병 이후에 반대로 가입자 확보를 위한 저가 경쟁이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은 질 좋은 콘텐츠로 가입자 수를 늘리는 선순환 경쟁 구도가 붕괴하고, 콘텐츠 시장은 더욱 황폐해질 수도 있다. 최근 넷플릭스가 엄청난 콘텐츠 투자로 우리 방송 시장을 급속히 침식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콘텐츠 시장의 붕괴는 전체 방송 시장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전에 새롭게 방송 시장에 진입했거나 인수를 통해 진입했던 신규 사업자들이 표방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콘텐츠 투자에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점도 그런 우려를 더 크게 만드는 이유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의 치밀한 승인 심사가 필요하며, 인수·합병 추진 사업자들도 콘텐츠 투자에 대한 신뢰할만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