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에 바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이제 50일이 지났다.
그간 문재인 정부는 국정교과서 폐지,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석탄발전소 일시 가동 중단 등 여러 사회적 문제에서 주요한 결정을 내려왔다. 또 국민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탈권위·친서민 행보를 보여주며 국정 지지율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ICT 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보기에 우리의 미래 먹거리인 ICT 산업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구체적 구상과 계획은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산업계에서는 이미 “이 정부에서 ICT 산업은 뒷전인 것 같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과학기술 전문가인 문미옥 의원이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에 임명됐지만, 전 정부의 미래전략수석에 비해 ICT 영역이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인수위원회 역할을 맡고 있는 국정기획자문위에서 ICT 분야가 포함된 경제 2분과 전문위원 중 정작 ICT 전문가가 드물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모두가 입을 모아 4차 산업혁명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4차 산업혁명을 제대로 이끌어 나갈 정부의 비전과 실천 과제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셈이다.
실제 우리나라는 ICT 활용도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제도적 측면에서는 중국에 뒤진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가 166개국의 ICT에 대한 접근성, 이용도, 활용력 등을 종합 평가한 ICT 발전지수 순위(ICT Development Index)에서 우리나라는 ICT 활용 역량 부분에서는 세계 2위에 올랐다. 그러나 인터넷 산업발전을 위한 육성정책 부분에서는 30위(중국은 33위)를 기록했으며, “기업에 우호적인 비즈니스 환경을 지원하도록 규제가 수립되었는가”에 대한 설문에서는 조사 대상 60개국 중 46위였다. 중국은 29위, 일본은 34위였다.
○ 규제 개선 구조 전환 시급
국내 ICT 산업이 제2의 부흥기를 맞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으로의 규제 체계 전환이 시급하다. 기업이 ‘할 수 있는 것’을 자세하게 나열한 현재의 포지티브(positive) 규제에서 벗어나 ‘해서는 안될 것’을 규정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으로 규제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을 나열한 현 규제 체계로 인해 국내 인터넷 기업들은 혁신적으로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제한된 영역에서만 서비스를 구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는 없는 여러 가지 규제로 인해 국내 서비스는 점점 더 내수화되고 있다.
중복된 규제도 시급하게 손을 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개인정보는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에 관한 법률, 위치정보의 보호 및 이용에 관한 법률 등 여러 법안에 걸쳐 중복으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위치정보법이 독립적으로 제정된 사례는 우리나라가 최초다.
이렇게 동일한 영역이 여러 법안에 걸쳐 포지티브 방식으로 규제가 돼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신선한 서비스 모델을 만드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 찾기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데이터 산업 활성화 등을 위해서는 개인정보 처리 방식에 대한 규제도 풀어가야 할 숙제다. 국내 개인정보보호에 관련한 법률에서는 옵트인(Opt-in) 방식의 동의를 의무화 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 기업들은 옵트아웃(Opt-out) 방식으로 동의를 받는다. 국내 기업들의 경우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모든 과정에서 옵트인 방식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해당 정보의 처리 자체가 불편해지는 어려움을 종종 겪는다. 데이터 활용이 중요해짐에 따라 옵트아웃 방식의 필요성이 고개를 들고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넘어야할 산이 많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데이터 활용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불필요한 규제를 손봐 기술 발전의 선순환을 이끌어 내야 한다. 미국, 중국 등이 이용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신산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규제에 묶여 새로운 도전의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심화되고 있는 해외 기업과의 역차별 문제 역시 새 정부가 나서야 한다.
국내 인터넷 기업들은 연간 수십~수백억원의 망 비용을 통신사에 지불하지만, 유튜브는 국내 망을 무료로 사용한다. 이러다 보니 국내 사업자들은 망 비용이 무서워 이용자들에게 고화질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지만, 유튜브는 거리낌없이 고화질 서비스를 제공하며 동영상 분야에서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 하루 이틀 제기된 이슈가 아니지만, 우리 정부는 이런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 국내 사업자에 대한 규제만 강화하고 있다.
○ 새 정부가 갈 길 제시해야
새 정부의 정책 방향 제시가 늦어지면서 국회와의 엇박자도 심각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문재인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에서는 경쟁상황평가제 도입 등을 통해 부가통신사업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인터넷 산업은 동태적이고 비정형적 시장이므로 관련 시장 획정은 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획일적인 잣대로 시장을 획정하고 산업을 규제하겠다는 발상은 혁신과 성장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날로그 시대의 규제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산업을 규정해서는 안된다.
2008년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GAFA)의 시가총액은 208조원, 한국의 코스피(KOSPI) 시가총액은 855조원이었다. 그리고 9년 후인 2017년 현재 GAFA의 시가총액은 2594조, 한국의 KOSPI 시가총액은 1534조에 이른다. 9년 사이 미국 기업 4곳의 시가총액이 열배가 넘게 불어나는 동안, 한국의 경제규모는 채 두 배도 늘어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인터넷 산업에서도 이용자 보호를 위해 꼭 필요한 규제들이 있다. 하지만 글로벌 기준에 맞지 않는 ‘우리만의 규제’는 결국 이용자의 불편을 가중시켜 국내 서비스를 도외시하게 만든다. 또 기업의 규제 준수 비용을 발생시켜 국내 인터넷 기업, 특히 스타트업 등 중소 인터넷 기업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지난 20세기 100년의 발전은 21세기의 발전 속도로는 20년이면 다 해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얘기한다. 수십년 후면 우리는 해마다 ‘20세기 전체 발전’의 몇 배에 달하는 발전을 이뤄낼 수 있다는 얘기다. 커즈와일은 이러한 인류의 가속 발전을 ‘수확 가속의 법칙(Law of Accelarating Returns)’라고 명명했다.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활기를 잃어버린 한국 경제에 숨통을 트이는 일 또한 미뤄져서는 안된다. 인터넷 산업을 기반으로 한 ‘수확 가속의 법칙’에서 한국만 제자리 걸음을 해서야 되겠는가. 4차 산업혁명을 통한 경제 활성화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ICT 산업 분야에 대한 비전 제시와 규제 개선 노력이 하루 빨리 가시화되길 바란다.